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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우구스티누스의 감각인식에서 바라본 행복의 의미
영문 제목
저자 김은우 (성균관대학교 교육학과 초빙교수)
다운로드 pdf 아우구스티누스의 감각인식에 바라본 행복의 의미.pdf (463 KB)
논문 구분 일반논문 | 세계관기초
발행 기관 기독학문학회
발행 정보 (통권 34호)
발행 년월 2017년 11월
국문 초록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관조하는 것이 행복이고, 행복하기 위한 조건이 신을 관조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전제는 신과 행복을 ‘영원함’(sempiternum)이라는 관계에 놓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영원함은 가변적이지 않고 영구한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영원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본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신을 관조’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신을 관조하는 단계는 인식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가능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 인식과정은 외적 감각에서 내적 감각으로 이동이다. 외적인 것은 신체의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면, 내적인 것은 신체 내부에 위치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저서 중에서 전기에 속하는『행복론』에서 외적 감각을 내적 감각보다 열등하게 표현한다. 인식의 위계질서를 두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함이면서 동시에 신을 관조하는 것이 올바른 인식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궁극적으로 신을 관조하는 것이 영원한 것을 찾는 것이고, 영원한 것을 찾는 것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행복(eudaimonia)은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어왔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행복(happiness)은 심리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의미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행복이 보다 객관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좋은 삶’(the good lif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다가 오늘날에는 주로 ‘웰빙’(well-being)으로 번역되어 사용하는 경향을 드러낸다(유재봉, 2013, 85; Ackrill, 1995: 198).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서 현 교육에서 행복 개념의 오용은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첫째, 학교교육이 지식교육의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행복 개념을 사용하는 것처럼 비쳐진다. 이런 행복 개념은 지식의 일환으로 사용될 우려를 갖는다. 실제로 학교교육은 진정한 의미의 행복(교육)을 가르치기보다는 시험이라는 관문을 성공적으로 통과할 경우 얻어지는 결과로 행복을 둔다. 둘째, 행복 개념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 혹은 심리적이며 욕구를 충족하려는 의미로 드러난다. 셋째, 행복은 물질과 정신의 지속적 상태를 중시하는 경우이다(신정근·이기동, 2015: 40). 그러나 행복이 지속성을 내포한다고 해서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의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행복 개념이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가 되고 있지만 행복의 근본적인 의미를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는 (기독교)교육에서 조차도 행복 개념을 올바르게 혹은 비중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외적 감각 인식을 통해서 행복 개념이 주는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행복은 불변하는 것을 찾는 것이다. 인간이 행복을 최고선으로 추구한다면, 그 행복은 영원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행복을 왜곡된 인식에서 추구하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올바른 인식이 온전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추구하려는 행복은 인식의 위계구조를 형성한다. 그 위계구조는 먼저, 외적 감각을 통해서 수용된 모든 정보들을 내적 감각으로 전달하고, 다음으로 내적 감각으로 전달받은 정보들은 이성으로 보내진다. 마지막으로 이성에서 인식된 정보들은 지성(sapientia)을 통해서 신을 관조하게 된다.
이 논문의 목적은 외적 감각인식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의 의미를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의하는데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외적 감각이 무엇이고, 외적 감각을 돕는 아니마의 의미와 외적 감각과 행복이 어떠한 관계와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논의 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현 (기독교)교육에서 행복이 어떻게 이해되고 논의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해 제시한다.
영문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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