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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성교육’의 학문적 정체성 탐색 : 종교심리학과 교육학의 통합모형
영문 제목
저자 정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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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 [교육A] 정문선 (논평 임정연) 성장을 위한 교육.pdf (143 KB)
논문 구분 일반논문 | 교육학
발행 기관 기독학문학회
발행 정보 (통권 32호)
발행 년월 2015년 11월
국문 초록 지난 2014년 12월 29일, ‘인성교육진흥법’(이하 진흥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2015년 1월 20일 공포됨에 따라 6개월 후인 지난 7월 이 법이 발효되었다. ‘진흥법’은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을 갖춘 시민 육성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법이다. 이 법에서는 ‘인성교육’을 “자신의 내면을 바르고 건전하게 가꾸며 타인, 공동체, 자연과 더불어 사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라고 정의한다. 전국의 초·중·고교는 매년 초 인성교육 계획을 교육감에게 보고하고, 인성에 바탕을 둔 교육과정을 운영해야 한다. 교육은 인성교육 연수를 받은 각급 학교교사와 전문인력 양성교육을 받고 자격을 취득한 사람이 담당한다. 이를 위해 사범대·교대 등 교원양성기관은 인성교육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필수 과목을 개설해야 한다.
‘진흥법’에서 정의한 ‘인성교육’의 정의에 의하면,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나뉜다. 하나는 ‘무엇’(What), 즉 교육내용과 관련되는 것으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competence)의 개념을 명료화하는 일이다. 인성이라는 개념은 다른 하나는 ‘어떻게’(How), 즉 교육방법과 관련된 것으로 ‘기르는 것’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진흥법은 인성교육의 내용을 여덟 가지 윤리적 덕목, 즉 예, 효,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역량 두 가지, 즉 의사소통능력과 갈등해결능력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성교육 연수와 전문인력 양성은 어느 학과에서 담당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는 인성교육의 학문적 정체성을 정확히 규정할 때 자연스럽게 대답될 수 있다.
인성교육의 학문적 정체성을 정확히 규정하려면 먼저 ‘인성’ 개념을 명료하게 해야 한다. 유재봉은 「세속대학에서의 인성교육」에서 ‘인성’의 개념을 분석하면서, 이 자체가 외연과 내포가 불분명한 애매모호한 개념임을 드러내준다. 그에 의하면, 인성교육에서 ‘인성’은 ‘인간성’(humanity), 성격 혹은 개성(personality), 인격(character)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애매하다. 또한 인성은 광의(廣義)로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향 전체를 일컫는 것에서, 협의(狹義)로는 고상한 인간다운 성품 혹은 인격에 이르기까지 그 한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모호하다(유재봉, 2014: 86). ‘인성’의 세 가지 개념군 중 특히, ‘성격 혹은 개성’을 연구하는 학문분과는 심리학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정신분석학, 분석심리학, 인본주의 심리학, 자아심리학 등이다.
다음으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른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인성’을 여덟 가지 덕목과 두 가지 역량으로 보는 진흥법의 정의는 ‘인성’을 총체적인 시각에서 파악하고 있다기보다는 여전히 기능주의적인 시각에서 정의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남겨둔 채, 여덟 가지 덕목과 두 가지 역량을 갖추도록 하면 인성이 길러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을 바르고 건전하게 가꾸며 타인, 공동체, 자연과 더불어 사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는 것을 인성을 ‘기르는 것’이라고 볼 때, 이것은 에릭슨의 인간 발달단계에 따른 ‘자아실현’ 내지 ‘자아통합’의 개념과 유사해 보인다. 안신의 「에릭 에릭슨의 종교심리학에 대한 연구: 발달이론과 종교이론을 중심으로」에 의하면, 에릭슨은 인성발달에 있어서 종교의 사회적 측면과 심리적 측면을 동시에 강조했다. 또한 인성은 발달하는 과정에서 역사와 사회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는 역동적인 개념이다(안신, 2008: 186).
‘인성교육’의 개념을 밝히는 일은 필연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과 만나게 된다. 이 질문을 다루는 학문은 다양하다. 사실 모든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학문들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철학(philosophy, 哲學)에서 분화되어 왔다. 교육론(敎育論)으로서의 교육철학은 서양철학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대체로 현대적인 의미의 교육학(敎育學)은 19세기 헤르바르트(J. F. Herbart)의 『일반교육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는 철학, 구체적으로는 윤리학에서 교육의 목적을 도출하고, 교육의 방법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헤르바르트는 교육자가 해야 할 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교수’(instruction)에 있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교수는 순전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인격의 형성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특별히 ‘교육적 교수’(educative instruction)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의지는 사고권에서 솟아나오며, 결국 도덕성은 지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인간은 교수를 통해 사고권을 형성하며 교육은 인격을 형성한다(윌리엄 보이드, 1964: 418-419).
심리학은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감각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내성법(內城法)을 주창한 소크라테스에게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심리학은 19세기 분트(W. M. Wunt)에 의해 분화되었다. 분트는 과학적이지 않은 심리학 연구를 실험을 통해 자연과학처럼 객관적인 학문으로 만들고자 했다. 분트 이후 심리학은 철저하게 객관화, 과학화의 길을 걷는다. 그러다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등장으로 인간 내면의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가 심리학의 큰 이슈로 등장한다. 프로이트 이후, 칼 융(Karl Jung)에 의해 성(性)에너지인 리비도(libido)를 통한 단일한 인간 정신 해석을 넘어 보다 심층적인 분석심리학으로 분화된다.
교육을 어떻게 규정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을 기르는 일과 관련이 있다면, 교육의 관심사가 교과의 지식을 축적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인간 자체를 기르는 일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교육의 관심사가 교과의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기르는 일이어야 한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교육이 대상으로 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한 인간 자체를 ‘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성교육도 교육인 이상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본 논문은 ‘인성교육’의 학문적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그 개념 속에 전제된 ‘인간’과 ‘기른다’는 의미를 학제간(interdisciplinary) 접근을 통해 명료화하고자 한다. 첫째, ‘인성’의 개념군중 하나인 ‘성격 혹은 개성’을 연구하는 심리학의 다양한 견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학제간 접근의 모델로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의 ‘인격의학’ 내지 ‘기독교 심리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 이상의 논의들을 통한 교육학적 의의를 밝히고, 바람직한 인성교육 모델을 제안하고자 한다.
세속적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내면세계, 성장 혹은 성숙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위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발달 측면에서 종교의 영향, 종교적 차원을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 기독교적인 가치에 기반한 것은 아니다. 칼 융이 지적했던 것처럼,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의 심리학 이론에서 말하는 종교 내지 영적 차원은 ‘영지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가 인성교육을 한다고 할 때, 이들의 아이디어를 참고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기본적인 전제, 즉 세계관(예를 들면, 무신론적 세계관/유신론적 세계관)이 다르므로 무조건적인 수용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음에서는 인간의 성숙, 인성의 발달에 관한 기독교적 심리학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투르니에에 의하면, 인간은 동시에 두 개의 세계에 속한다. 하나는 자연적 세계이며, 또 하나는 초자연적 세계이다. 자연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음식을 소화시키며 늙고 병드는 동물적인 ‘몸’(body)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경험하고 사물을 상상할 수 있는 부분, 즉 그가 ‘정신’(psyche)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지성, 즉 생각하고 추리하고 뜻을 정하며 추상적인 생각을 다루는 ‘마음’(mind)이 있다. 몸, 정신, 마음이라 불리는 인간의 세 가지 자연적 부분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될 수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게리 콜린스, 1998: 54). 예를 들어 몸이 아프면 정신과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몸과 정신에 영향을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도 몸과 마음에 영향을 주게 되어있다.
투르니에는 그의 저서에서 정신과 의사들과 신학자들이 함께 참석했던 모임에 대해 쓴 적이 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이 속해 있는 학파를 밝히기로 결정되었다. 이것은 투르니에를 딜레마에 빠뜨렸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특정 학파와 동일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소크라테스학파에 속한다고 진술했다. 그것은 그가 수세기 전에 소크라테스가 사용했던 솔직한 대화의 방법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를 좀 더 분명히 이해하고 개인적인 확신을 개발하도록 도와주려 노력했다(게리 콜린스, 2004: 70-71).
이는 투르니에의 학습과 교육에 대한 견해를 적절히 요약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는 어린이가 옳고 그른 기준을 습득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역 사회의 책임있는 구성원이 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끊임없는 사실의 목록을 지루하게 암기하고, 신비스러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억압하고, 서로 경쟁을 벌이고, 좋은 성적을 위해 싸우고, 부모가 친구들 앞에서 체면을 잃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고 강요당하고 있다. 투르니에는 고독했던 학창시절에 이와 같은 교육 형태에 적지 않게 직면했음에 틀림없다. 후에 그는 이러한 교육방법을 모두 거부했다(게리 콜린스, 2004: 71).
그 대신에 투르니에는 ‘교육에 있어서 모험의 정신’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는 학생은 점잖게 앉아서 어른들의 사실을 수동적으로 받아 넣는 빈 자루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학생은, 모든 학과를 모험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선생이 있을 때 학습에 진정한 관심을 보이는 창의적이며 호기심이 많은 개인이라고 주장한다(게리 콜린스, 2004: 71). 교수들이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의 견해를 검토하려고도 하지 않을 때 대학생들이 반발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가장 좋은 학습은 선생이 수동적인 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생과 선생 사이에 대화가 있고 함께 배우려는 상호욕구가 있을 때 최선의 학습이 이루어진다(게리 콜린스, 2004: 71).
객관주의, 계량주의, 과학주의에 사로잡히면 인간과 삶의 신비로운 차원은 배제되고 만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자들, 특히 융의 분석심리학에 비추어 보면, 삶의 의미는 오히려 인간의 마음 혹은 영적 차원에서 성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융은 현대인들의 영적 추구가 사실 영지주의와 다름없다는 매우 정확한 현상 해석을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기독교와 동일한 선상에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기독교교육이나 인성교육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에는 보다 세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이에 필자는 객관주의나 과학주의 시각에서는 다소간 불만족스러울 수 있지만 인간을 전인격적 존재로 규정하고, 기독교 정신과 심리학적 통찰을 균형있게 유지하고 있는 폴 투르니에의 기독교 심리학을 검토하는 것이 인성교육의 기반을 다지는 데 많은 유익이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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