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몇 년 전 ‘기독학생연대’라는 단체에서 나에게 ‘기독교 안에 정치적 우파와 좌파가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강연을 부탁했었다. 주최 측의 강연 취지는 “어떻게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성도들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같은 교회, 같은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은 천차만별이고 극단으로 대립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냐는 물음이었다. 교회에서는 그 어떤 정치적인 이야기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인지, 교회에서는 정치에 대한 어떤 가이드도 제공하면 안 된다는 것인지, 성도들은 그냥 알아서 각자 정치적 입장을 결정하고 알아서 활동하면 된다는 것인지, 이런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나 역시 공공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이런 질문을 종종 받는데 그때마다 참 난감하다. 나라고 딱 부러지는 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는 정말 금기시된다. 목회자뿐 아니라 성도들끼리도 누군가 정치 이야기를 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 괜히 좋았던 관계가 어색해지기도 하고, 선입견을 갖고 판단하게 된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은 민감하고 예민한 부분이다. 나와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과 말을 섞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가능하면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정치적 양극화와 편향성은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의 경우 지역적 편견이 더해져 그 간극이 더욱 벌어졌다. 정치적 양극화로 분열과 증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정치철학자들은 절차적 민주주의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심에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합의와 타협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소극적인 민주주의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동선과 좋은 삶을 향한 열정을 끌어내야만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시대 미국을 대표하는 교육 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파커 파머(Parker J. Palmer)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마음의 습관’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습관, 그 습관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는 열망이 중요하다.
취향이 비슷하고, 정치적 견해가 유사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 안전하고 편하다. 괜히 얼굴 붉히며 싸울 일도 없고,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와 사회는 결코 안전하지도 풍요한 삶을 가져다줄 수도 없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과 함께 뒹굴고 부대끼며 사는 것은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의 에너지를 끌어올리고, 공공선을 형성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언제든 다른 생각과 의견을 맘껏 말할 수 있는 사회가 안전한 사회이다. 단순히 머리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자부심, 신뢰, 믿음의 근원은 바로 ‘공감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동의’(agree)보다 ‘공감’(sympathy)을 요청하고, ‘합의’(consensus)보다는 ‘연대’(solidarity)를 배양하는 곳이다. 민주주의는 긴장을 끌어안기 위해 고안된 제도이다. 그 긴장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에너지로 만들려는 노력이다. 시민들이 가져야 할 덕목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나와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할 줄 아는 공감 능력,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의견을 조율하고 연대할 수 있는 마음이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가장 말이 안 통하는 집단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 고집불통에 비상식적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 보자. 교회가 민주주의의 덕목을 학습하고 배양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는 없을까? 매주 전 세대가 어울려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함께 식사하며, 심지어 정치적 이념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같이 한다. 달리 보면 그 어떤 공동체에서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연대를 매주 구현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사회에서는 절대 말을 섞지 않을 사람도 교회 안에서만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그렇다면 교회야말로 다원주의를 학습하고 실습할 수 있는 훈련소라 할 수 있다. 교회에서는 나와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훈련을 할 수 있다. 차분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공감해주며, 아픔을 위로해 줄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함께 조율하면서 토론할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이렇게 교회 안에서 건강한 다원주의를 연습했다면, 이제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훈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 정치적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는 것, 정말 꿈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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