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서사학(narratology)을 공부하며 인문학도의 삶을 다짐하던 무렵, 종로는 일상의 낭만과 연구 아이디어가 샘솟는 곳이었다. 이후 종각역과 종로3가역 사이에서 시간을 탕진하는 생활이 발명되었다. 종각역 옆에는 종로서적 등이 있었고, 종로2가에는 허리우드 극장, 시네코아가 있었다. 종로3가에는 단성사, 피카디리 극장, 서울극장이 있었다. 그 무렵 시에 취하고, 음악에 울고, 소설로 무너지고, 영화로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소설과 영화일수록 삶에 대한 전망을 복잡하게 한다고 느꼈다. 평소 품고 있던 이런저런 질문에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들은 오히려 더 큰 질문에 가닿게 하는 도구였다. 살면서 겪은 자잘한 곤경을 떨치려 영화관에 갔다가 무지막지한 혼란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소설과 영화에도 하나님이 감춰두신 편지가 있다는 사실은 시간이 더 지난 뒤 알게 됐다. 이야기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현실 세계 속 평범한 이웃들보다 극단적인 공포와 환희,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갔다. 그들의 삶을 내 삶인 양 전유하고 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낙차가 보였다. 새벽 예배당 구석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할머니 권사님의 삶을 더 잘 헤아릴 수 있었다. 완전한 합일에의 약속이 있는 신화적 사랑에서 방금 추방당한 이의 처진 어깨가 더 잘 보였다.
그런 어떤 순간에 성경이 다시 읽혔다. 형편과 모양이 다른 모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세심한 스토리텔링이 거기에 있었다. 비틀즈 이후 새로운 팝이 가능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화법을 빌려 말하면, 성경을 제대로 경유하고 나면, 그 이상 완전한 이야기란 불가능하다. 오래도록 살아남은 이야기의 대표적인 유형은 ‘성장’, 혹은 ‘모험’의 플롯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모세, 야곱, 요셉, 다윗과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성장 서사’와 ‘모험 서사’가 극적으로 착종된 형태다. 하나님은 우리가 쉬이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플롯을 따라 자신의 형상을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장 내밀한 스토리텔러가 되신 분이다.
세상을 이야기로 보기 시작하면, 우리가 ‘호모 나랜스’(Homo Narrans)란 사실을 알게 된다. 실제로 신경생물학, 뇌과학, 인지과학, 심리학 분야의 연구성과를 모아보면, 인간은 분절적인 시간 단위로서 에피소드들을 엮어 자기 경험을 조직하는 인지적 과정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인간이 행하는 정신 활동의 기저에 ‘서사 충동’(narrative drive)이 존재하는 것이다. 폴 코블리(Paul Cobley)는 스토리야말로 세계를 사유하는 근본 방식이라고 말하고, 테오도르 사빈(Theodore R. Sarbin)은 서사를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근본적인 은유’로 설명한다. 그처럼 인간은 은연중에 서사 구조에 따라 지각하고, 상상하며 도덕적 선택을 내린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미 있는 만남이란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만나 각자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세계를 끊임없이 이야기화하여 받아들이고,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갱신하며 살아간다. 지금까지 내가 밟아온 이야기의 다음 순간에 대한 긴장감 있는 기대와 예측을 즐기며 오늘을 건넌다.
개인적으로 박사과정에 들어간 직후부터 소설과 영화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게임, 웹툰 등 세상에 존재하는 서사물, 이른바 스토리콘텐츠를 횡단하며 살았다. 디지털 시대가 전면화되면서 이야기는 끊임없이 다른 매체로, 새로운 장르로 분화되고 있다. 우리는 국가, 민족, 인종, 지역 등의 경계가 거의 소멸된 미디어 수용 환경에서 순식간에 글로벌 콘텐츠가 되는 사례들을 빈번하게 만나는 중이다. 일부 콘텐츠는 세계인의 화두가 되어 글로벌 비평장을 뜨겁게 달구기도 한다. 세계인이 ‘호모 커넥투스’(Homo Connectus)가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오늘날 스토리콘텐츠를 기획·비평하는 공부를 한다는 건, 결국 호모 나랜스이자 호모 커넥투스로 살아가는 세계인을 이해하는 일이다. N스크린 시대가 되면서 그들은 언제든지 접속 가능한 스크린을 통해 위로와 공감을 얻고 지식을 구한다. 국경 안팎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실시간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론 가깝지만 몸은 멀리 있는 지인들과 일상을 공유한다. 현금 대신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신용카드만큼 스마트폰 간편결제를 이용한다. 원격근무, 화상회의는 이미 일상화되었고, 인터넷쇼핑, 인터넷 뱅킹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이제 책도 구독경제의 대상이 되어 스크린 위에서 스트리밍된다.
언젠가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를 두고, 미국 전체가 사실상 디즈니랜드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일상에 넘쳐나는 물리적 스크린들은, 우리 사회 전체가 거대한 스크린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시간에도 스토리콘텐츠 선택의 주도권과 향유의 자율권을 쥐고, 우리 이웃이 OTT(over-the-top) 플랫폼에 접속해 있다. 그들에게 “구별하고 단절하라”, “경계하고 싸워라”라는 조언이 반드시 옳은 건 아니다. 장성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분별하고 해석하라”라는 말, 그와 아울러 “접속하고 대화하라”라는 말이 공유되어야 한다. 앞으로도 무수한 스크린을 통해 나와 너 사이에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쏟아질 것이다. 할 일은 많고,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원하는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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