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나는 기독교 세계관을 학문으로 만나지 않았다. 학문의 길을 가던 도중,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육철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학문과 삶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교육철학은 한 마디로 ‘좋은 교육에 대한 탐구’이다. 뛰어난 학자들처럼, 좋은 교육에 대한 나만의 관점을 갖는 것이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유였다. 흔들리지 않는, 누가 물어도 답할 수 있는 그런 ‘진리’를 찾고 싶었다. 그런데 ‘좋은’이란 말의 의미는 시대마다 학자마다 매우 달랐고, 교육의 의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떤 학자의 장점은 다른 학자에게는 단점이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학문 영역에서 길을 잃었다.
비슷한 시기,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삶의 영역에서도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배워왔던 공부는 좋은 아내 또 좋은 엄마가 되는 데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내로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고, 집을 청소하는 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를 잘 돌보는 데 허스트의 지식의 형식이 무슨 상관이지? 그동안 배운 교육이 가정을 꾸리고 사는 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학교는 삶에서 10여 년이지만, 가정은 평생이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시간이 가정과 상관이 없다면, “교육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삶으로부터 던져졌다.
나는 진리를 내 힘으로 찾고자 한 학문적 욕구와 좋은 인간이 되고 좋은 삶을 살고자 한 삶의 실천이 좌절된 끝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고, 내 안에는 일말의 선함도, 선을 행할 능력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 구원받을 수 있으며,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졌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갈 2:20)라는 말씀처럼, 전 존재가 새로운 가치로 변화되었고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앞으로의 비전과 꿈은 교육 분야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에게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기도이자 신앙의 실천이다.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지?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그리스도인답게 학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것은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떨어뜨리면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것과 같다. 나의 마음 밭 가장 깊은 곳에 신앙이 자리 잡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결단하고 훈련받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전 영역 중 ‘지금 여기에서’ 내가 순종할 수 있는 부분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것으로, 사적 차원에서 공적 차원으로까지 번져나가는 삶이다.
현재 교육은 파괴적인 경쟁, 학교폭력, 높은 사교육비, 교권 추락 등 여러 가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학생, 부모, 교사 어느 누구도 행복한 교육이라고 충족감을 느끼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얼마나 실제로 개선하고 있는가는 잘 모르겠다. 특히 법치국가에서 교육의 문제들을 각종 ‘법’으로 해결하려는 방식은 필수적이지만, 과연 그것이 교육적인가는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학교폭력을 엄정하게 해결하기 위해 마치 사법체계처럼 접근하는 것은 일견 이해가 되지만, 그 과정에 부모의 참여나 대화가 원천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은 문제를 ‘화해’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분쟁’으로만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대안 교육뿐만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공교육’ 분야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는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 주시는 비전은 공교육에서 ‘종교’를 필수로 가르치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세속적인 성공, 예를 들면 돈을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인기 있는 학교에 진학하는 것,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나 직업을 얻는 것에 혈안이 된 교육 현장에 눈을 들어 위, 즉 삶의 이상들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인가?”라는 도전은 오늘날에도 유효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학문을 하는데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논문을 쓸 때마다, 신앙의 메시지를 낭만화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학문의 엄격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너무 어렵다. “어떻게 하면 신앙의 언어를 게토화시키지 않으면서, 공적 영역에서도 통용되고 이해될 수 있도록 잘 풀어낼 수 있을까?”, “이 둘의 통합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가?”라고 머리를 쥐어뜯는다.
이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을 달라고 기도로 간구하며, ‘두 권’의 책을 집어 든다. 세속 교육학자 존 화이트(John White)의 <잘 삶의 탐색>(교육과학사)과 기독교 학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의 <인간의 번영>(IVP).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삶인가?”, “교육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삶을 지향하도록 해야 하며,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세상 학문과 기독교 학문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한다. 나의 공부와 연구가 단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살리는 데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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