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라는 말은 잘 알려진 성경 속 하나님의 명령이다. 근간에는 한국의 저출산 때문에 결혼식 주례를 하시는 목사님이 이 말씀을 자주 언급한다. 유엔인구기금(UNFPA)은 <2021년 세계 인구 현황 보고서>에서 대한민국 출산율이 세계 198개국 중 198위라고 밝혔고,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역임한 크리스틴 라가르드(Christine Lagarde)는 한국을 집단적 자살 사회라고 했으며, 옥스퍼드대의 인구학자 데이비드 콜먼(David Coleman)은 한국에서의 국가적 인구 소멸을 경고하기도 했다.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이제 위기 정도가 아니라 공포다. 수년 전에 비하여 매우 썰렁해진 대강당을 보면서, 비수도권 대학에서 일하는 필자는 그 공포를 몸소 체험 중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아기를 가지지 않으려는 신혼부부는 죄책감을 가지기도 한다. 반면에 가지고 싶어도 불임으로 힘들어 하는 이들 또한 곤경에 빠진다. 그런데 이 말씀이 처음 선포되었던 창세기 1장 28절을 잘 들여다보면, 이는 명령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새번역). 이어진 내용과 또다시 성경에 언급된 생육과 번성의 축복을 관찰해 보면, 사람 수를 충분히 가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단지 인구 증가를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의 원어는, “열매 맺고 (자식을 낳고), 많아져서 땅을 가득 채우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우선은 자식을 낳아야 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뒤따르는 말씀을 보면 그 목적이 단지 출산 도모에 있지는 않다. “......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출산의 목적은 인간이 몸담아 살고 있는 물리적, 사회적 공간을 잘 운행하기 위함에 있다. 무조건 많이 낳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구의 과잉 성장은 과거에서 근래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큰 문제였다. 원시사회에서는 한정된 식량과 사회적 문제 때문에 인구 증가를 제어해야 했다. 성경의 출애굽기를 보면, 이집트 왕정이 히브리 노예의 번성을 염려하여 집단적 남자 유아 살해를 집행했다. 노아 홍수 이야기와 비슷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홍수 이야기를 보면, 신들이 인간을 물로 멸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인간의 소음 때문이었다. 시끄럽다는 것은 인간의 과잉번성을 의미한다. 이는 원시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으며, 그 염려가 신화에 투영되었다. 사실 한국과 중국이 자녀를 둘이나 하나만 갖자고 사회적 지침을 두었던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문제의 초점은 적은 인구수가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너무 많아서 걱정이었다. 문제는 인구가 번성해서 사람이 사는 공간과 사회가 효과적으로 운영되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다. 인구가 적어도 잘 살고 훌륭하게 운영되는 선진국도 많다. 때문에, 자식을 낳지 않거나 못 낫는다고 하여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인구 절감’으로 인해 부족한 인력을 이민자로 대체하는 것이 염려된다고 솔직히 말하는 지인들이 많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이민자가 우리 사회에 정착하더라도 조화롭게 잘 살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실천하겠다는 신앙적이고 사회 도덕적인 인식을 함양해야 하지 않을까? 육아와 자녀 교육 등의 현실적 문제가 염려되어 아기를 낳는 것이 두렵다는 젊은이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정부가 더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세워서 마음 편하게 아기를 낳고 기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옛날처럼 남녀는 무조건 결혼해야 하고 여자는 아기를 쑥쑥 잘 낳아야 한다고 권유하기 위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열심히 결혼하고 자식을 줄줄이 낳아 첫 인류는 잘 번성했다. 하지만 자신의 터전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와는 달리 번성한 인구의 윤리성이 문제였다(창 6:5). 그러자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과 명령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홍수로 인류를 멸하셨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인구수의 유지 또는 번성이 아니라 백성들이 그 사회를 잘 운영하지 못한 것에 관한 책임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남은 노아의 가족에게 하나님은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도 축복이 명령에 앞섰다(창 9:1). 과거의 실패(?) 경험 때문이었는지, 이번에는 하나님이 인간이 번성하여도 사회를 잘 운영할 수 있도록 변화된 정책을 내놓으셨다. 창세기 9장 2-6절이다. 종전의 채식 명령을 수정했는데(참조, 창 1:29-30), 하나님은 문제였던 인간의 폭력성을 부분적으로 허락하셨다. 그리고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장했다.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의 폭력을 통제했다. 인간이 생명이 있는 피를 먹지 못하게 했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살해는 금지했다(참조, 창 1:26-27).
생육과 번성은 이를 통해 인간이 사회를 어떻게 잘 운영하느냐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같은 명령을 야곱에게 하시면서 하나님은 그 번성을 통해 왕이 나올 것을 축복하셨지, 막대한 인구수로 거대 민족 형성을 바라지는 않으셨다(창 3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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