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랐다. 나에게 하나님은 많은 모태신앙 출신자들처럼 참으로 익숙했지만, 한동안 그저 하나의 개념으로만 존재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개념만으로 존재하시던 주님께서 중학생 시절 다녀온 선교여행을 했을 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주셨다. “은찬아, 내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 하나님이야. 내가 너를 참 많이 사랑한단다.”
고등학생 때는 부모님을 떠나 기숙학교로 입학하게 되었다. 집을 떠나 홀로 믿음을 지키는 것은 참 어려웠다. 그래서 고등학교 생활 내내 그저 교회에 출석만 하거나, 그마저도 안 했던 경우도 많았다. 이런 양상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나는 주님과 맺은 인격적인 관계가 있었던 덕분에 다행히 주님을 부정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나의 삶은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이신 주님께서 이 시절에도 나를 최대한 지키시기 위해서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주셨나 싶기도 하다.
시간이 또 흘러 나라의 부름을 받아 군 입대를 했다. 사실 나는 주님과 맺은 인격적인 관계 등을 근거 삼아 자신을 우월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일종의 선민의식이 있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나는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동료 전우와의 차이점은 오로지 군번밖에 없었다. 전쟁터에서 누가 죽든 국방부의 사상자 통계는 똑같이 반응한다는 사실에 나는 무력감을 느꼈고,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에,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이름은 자신이 아닌 일종의 수식어에 불과했고, 내 육신도 매 순간 세포가 죽고 태어나는 것을 반복하고 달라지기에 존재를 증명하기엔 불충분했다. 사진이나 컴퓨터의 메모리 장치가 나에 대해서는 더 잘 기록하고 있어 내 기억 역시 내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여겨졌으며,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 또한 증명이 불가능했다. 나는 분명 버젓이 살아 숨 쉬고 있는데 그 어디에도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었고 혼란과 절망으로 가득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나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정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부모님의 아들이라는 상대적인 정의로 존재했고, 이런 방식으로 대를 거슬러 올라가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까지 갈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장 14절에 기록된 것처럼 스스로 계신 분이셨다. 절대적인 존재가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하셨고 주님 없이는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순간 ‘만물의 주재’, ‘절대자’, ‘창조주’ 등 단어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주님은 내가 그분의 이름조차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영원하고 존귀한 분이셨다. 그러한 분이 나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호의를 보이시고 나를 종을 뛰어넘는 아들로 삼으려고 하시는 그 행동이 그저 사랑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안 되는 은혜였다.
이러한 경험과 깨달음을 통해서 나는 즉시 주님께 돌아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어느새 그런 사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고, 이런 경험과 깨달음이 있다는 점을 내세우며 우월감에 빠져 거만하게 행동을 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바리새인으로 살아가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의 죄를 거울삼아 내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 거울 너머에는 흉측하고 저주받아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 서 있었다. 죄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주님을 배신한 내가 서 있었다. 나는 비로소 자신이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돌을 든 사람 중 하나가 아니라 간음한 여자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성경의 사랑은 평범한 중산층 사람이 재벌을 만나 팔자를 고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의 사랑은 절대적인, 만물의 주재이신 주님께서 돌을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을 아들과 딸로 삼으시려고 온갖 수모를 겪으시면서 희생과 용서를 반복하는 이야기이다. 죄인인 나에게 진노를 쏟아 심판으로 정의를 실천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 대신에 십자가를 참으시면서 죽음을 맞이하시고 부활하시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야기이다.
나는 성경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세리이고 죄인이다. 주님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지만, 매 순간 죄를 사모하는 자신의 마음을 보고 절망한다. 그때마다 주님의 사랑을 되뇌이며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주님께 빚진 자이다. 비록 자격 없고 능력 없는 죄인이지만 그 사랑에 보답하기를 갈망한다.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분명 나의 노력으로 되는 건 없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만물의 창조주께서는 나의 미미한 노력조차 귀하게 여시시고 땅끝까지 이르는 주님의 사랑의 증인으로 삼아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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