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공공성(public)은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 즉 ‘공적인 것’을 어원으로 한다. 그것은 개인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자신에서 벗어나 전체를 볼 수 있는 성숙성(maturity)을 의미한다. 또한 ‘사사로운 일’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공동체와 관련된 사안이나 활동을 뜻했는데, 영어에서도 ‘public’이라는 단어는 ‘사회 내의 공동선’을 의미하는 데 처음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자로 풀면 ‘공공성’에는 public을 뜻하는 공(公)과 common을 뜻하는 공(共)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공공성’, ‘공동선’이란, ‘공동체에서 일어난 어떤 사안을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공동의 문제로 여기며 성숙하게 다루는 것’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공동선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실현’해 내는 것은 수많은 타자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현대 사회 시민들이 더 나은 공존을 위한 책임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공공성 함양과 실천’을 비전으로 삼고 있는 공공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토론하며 꽤 자주 ‘은혜를 받았다’. 한국 사회와 세계의 불의와 불평등, 이웃의 고통을 들여다보며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 평등, 사랑, 평화의 회복을 이야기할 때, 성서의 여러 장면과 가르침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종교’는 신앙의 경험과 구원의 측면에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이며 단독적인 영역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성서의 많은 부분에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기록이 있고, 예수는 ‘공생애’라는 삶의 흔적을 통해 공적인 것에 대한 모범을 보이셨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의 경제 개발과 성장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개인의 영혼 구원과 천국, 축복이라는 소위 ‘번영신학’에 몰두했고 이는 많은 신자들의 신앙관, 가치관 형성에 고스란히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민주화 과정에서 권력에 순응하거나 침묵했을 뿐 시민적 저항과 공론의 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공적 영역에서 기여한 바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해 초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2023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에 이와 관련한 시민들의 의식이 잘 나타나있다.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에 전체적으로 기여하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에는 70.8%가 부정 응답(전혀 그렇지 않다 27.0%, 별로 그렇지 않다 43.3%)을 보였고, 한국교회가 사회 공동의 이익과 종교적 신념(교리)가 충돌할 때 어떤 것을 추구할 것 같은가를 묻는 질문에는 전체 응답자 중 23.6%만이 교회가 사회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020년 조사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신뢰도 제고를 위한 개선점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 부족’, ‘정직하지 못함’, ‘배타성’을 꼽았다 이러한 응답은 시민들이 한국교회의 신뢰도 제고를 위한 과제 1순위로 ‘이기주의’를, 목회자의 신뢰도 제고를 위한 개선점으로 ‘사회 공동의 이익보다 교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지적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공공신학은 공적인 영역에서 교회의 위치와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설명한다. 또한 실제적인 방법으로서 교회 안에서 공적인 것에 대한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게 하는 공론의 장 형성과 교회 밖 영역과의 소통과 참여를 촉구한다. 하지만 대형교회의 목회자 세습, 휘황찬란한 교회 건축, 목회자 납세 거부, 성 소수자와 타종교 난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 성폭력을 저지른 목회자에 대한 너그러움, 목회자 청빙과 은퇴 과정에서의 부조리 등 교회 안팎으로 시끄러웠던 사안들에 ‘공적인 선한 영향력과 소통’은 어디에 있는지, ‘공동’의 ‘선’은 어디에 있는지 묻게 된다. 위 신뢰도 여론조사에서 시민들이 지적한 대로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이 두드러지기에,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하며 지역사회를 섬기는 등의 공적 역할을 수행하는 일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위기를 넘어서기가 힘들다.
시민사회적 공공성을 ‘공동의 선’ 개념으로 신학화 하고자 하는 공공신학이 근거로 하는 성서 본문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각 사람에게 자원과 은사를 주심은 우리 모두의 유익을 위함”이다. 또한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듯이, 하나님은 애굽에서 탈출한 히브리 민중에게 광야에서의 생활과 가나안이라는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적 삶과 규범에 대해 가르치셨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 곳곳에는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 병든 자 같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에 대한 개인적, 제도적 실천 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한국 사회가 각자도생, 경쟁 사회, 승자독식 제로섬(zero-sum)사회가 된 지 오래이다. 한정적이고 고갈되는 자원을 서로 갖기 위해 ‘너는 너, 나는 나’, ‘나만 (패자가) 아니면 돼”라는 식으로 소외와 배제를 야기하고 패배자와 빈자를 양산하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각자도생, 과열 경쟁의 물결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를 거부할 수 없다는 듯 함께 흘러온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자본과 힘이라는 우상과 거짓 메시지에 저항하는 신념이자 삶의 양식으로서 공공선의 가치는 특히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이자 푯대일 수밖에 없다. 나누고 나누어도 모자라거나 사라지지 않는 가치, 나눌수록 오히려 전파되고 불어나는 가치를 진짜 값진 것으로 여기는 태도와 실천이 그리스도인들의 모범 사례로 더 많이 들려져야 할 것이다. 나의 주림과 고통이 해결되었을 때 섣불리 ‘은혜’라고 말하지 말고, 이웃의 주림과 고통을 함께 해결되었을 때 비로소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을 은혜롭게 찬양할 수 있기를, 그 과정에 나에게 있는 자원과 은사를 공동체에 내어놓는 ‘선함’과 ‘성숙함’이 있기를 기대한다.
공적 신학, 공공선이 강조되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기독 공동체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이웃과 세상에 영향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2024년 9월,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된다. 이를 조직하고 준비하는 그룹에서 ‘복음전도’와 ‘사회선교/공공선의 실천’을 각각 양쪽에 두고 둘 중 우선되는 것은 당연히 ‘복음전도’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이분법적 사고와 단순화의 오류로 성서와 예수의 가르침을 매우 협소하고 납작하게 만든 것이다. 무엇이라 부르던지 상관없이, 공적 신학, 공공성, 공동선의 동기와 목적은 “사랑하라”라는 말씀의 실천이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 전도의 여러 가지 형태 중 하나로 여겨져야 한다. 교회의 공공신학 실천, 그리스도인들의 공적 신앙 실천을 통해 더 많은 이웃이 교회와 함께 하고자 하고 사회와 시민들이 교회에 대해 재평가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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