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노인들이 모이면 ‘효도를 한 마지막 세대며 효도를 받지 못하는 첫 세대’, 혹은 비슷한 내용으로 자신들의 서글픈 처지를 푸념한다. 다른 나라 노인들이 다 행복하지는 않겠지만 한국 노인들은 특별히 불행하다.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빨리 경제를 발전시켜 선진국에 이르게 한 주역인데도,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에서 OECD 1위라는 데서 나타나듯이 천대받고 있다. 뼈 빠지게 일했지만, 부모, 자식 돌보느라 노후대책에 소홀했고, 자식들의 높은 성적, 좋은 학교에 목매느라 인성 교육은 게을리해서 역사상 가장 무례한 세대를 생산해 놓았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모두에게 필요한 지혜는 자신의 한계를 알아서 걸맞게 처신하는 것이다. 그래도 청년이 좀 과도하게 큰 꿈을 꾸고 좀 지나친 욕심을 부리면서 꿈을 이루려는 것은 용인될 뿐 아니라 심지어 장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인들은 그러한 과욕은 채울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도움도 줄 수 없다. 노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노욕(老慾)을 부리는 것이다. 이룩하고 싶은 것은 많고 중요한데 살날이 많지 않으므로 가능한 한 꼭, 그리고 빨리 이루려고 허겁지겁 달려들 수 있다. 결국 사회에 해만 끼치므로 이제까지 쌓은 명예도, 위신도 다 잃어버리고 건강까지 해칠 수 있다. 무대 한가운데 서서 설칠 생각은 얼른 버리고 멀찍이 물러서서 거들 수 있는 일만 조용히 하면 된다. 능력과 상황이 허용하지 않으면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도 큰 위로며 복일 수 있다.
지금 노인 세대는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선진국으로 키웠지만, 이들이 습득해서 이용했던 지식, 기술, 경험 등은 오늘날 대부분 쓸모없게 되었다. “노인 한 명이 사라지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는 격언이나 “집안에 노인이 없으면 옆집에서 빌려 와라”라는 충고는 옛날 아프리카나 사회가 급변하지 않는 덴마크 같은 곳에는 가치 있는 교훈일지 모르나 오늘의 한국에는 설득력이 없다. 이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곱게 늙는’ 비결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노인들이 한국교회를 크게 성장시켰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그런 공로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비판적이다. 원망스럽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역시 조용히 점잖게 할 일만 하여야 젊은 교인들이 존경할 수 있는 모범이 될 수 있다.
물론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자투리 일들이 여기저기 조금씩은 남아 있다. 노인들은 그런 일을 찾아 수행하는 것이 시간과 힘을 쓸모 있게 쓰는 길이다. 대학에서 젊은 교수들은 대학원에서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소개하고 노인 교수들은 신입생들을 위해서 쉽지만 무시될 수 없는 ‘입문’ 과목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고, 폐지를 주어 팔고 아파트를 경비하는 것도 그런 일이다. 하릴없이 소비나 즐기고 사회가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쌓은 경험과 아직도 남아 있는 힘과 재능으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수행하면 여생은 가치 있게 된다. 최근 여러 그리스도인 교수들이 은퇴 후에 선교지에 설립된 대학들에 가서 강의로 봉사할 계획을 하고 있는데 아주 멋진 선택이다. 은퇴해도 여전히 건강하고 연금이 생활비를 보장하는데도 평생 쌓은 소중한 교육경험과 지식은 묻어버리고 등산이나 바둑 같은 것으로 여생을 보내는 것은 자신과 사회에 대한 무책임이며 낭비라 할 수 있다.
모든 노인이 반드시 해야 할 것은 건강을 돌보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와 자녀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며 조금의 봉사라도 가능하게 한다. 우리나라처럼 건강보험 제도가 갖추어져 있는 나라에서는 건강해야 보험 재원이 절약되어 꼭 필요한 다른 사람들이 요긴하게 쓸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귀찮을 수 있지만,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필요한 양분을 섭취하는 것은 이웃에 대한 노인들의 의무이며 사회에 대한 공헌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젊은 세대와 정부도 이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든 노인들이 OECD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장 많이 자살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불효와 배은망덕의 문화를 그대로 두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일 뿐 아니라 ‘고려장’ 전설이 가르치듯 젊은 세대 자신들의 미래도 불행하게 만든다. 노인들이 건강과 최소한의 자존심을 유지하도록 돕고 보잘것없더라도 그들이 축적한 경험과 지식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정부는 은퇴한 교육자들로 ‘도덕경찰대’ 같은 것을 조직해서 비행 청소년이나 버릇없이 구는 시민들을 선도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노인들이 자신들의 시간과 능력을 가치 있게 이용하도록 하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물론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 천천히 변하는 것도 많고 오랜 경험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는 것도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고 공부한다. 그러므로 긴 세월과 시행착오를 투자해 습득한 노인들의 지혜는 모두가 다 금과옥조(金科玉條)는 아니지만, 모두를 쓰레기로 버리는 것은 엄청난 낭비다. 그들의 주장을 100% 따르지는 않아도 경청하고 참고하면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절약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을 다루는 문제에는 노인들의 경험과 지혜가 매우 소중하다. 경제적으로 돕는 것 못지않게 노인들의 위신을 세워주고 아직도 할 일 있는 유용한 구성원이란 자존심을 갖게 하는 것이 노인들을 존중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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