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역사상 일어난 많은 전쟁은 종교전쟁이었다. 더구나 인류 역사에서 끔찍한 대학살, 인종청소, 정복과 폭력의 역사는 ‘기독교의 하나님’ 이름으로 자행된 적이 많았다. 십자군 전쟁, 30년 종교전쟁, 나치의 유대인학살, 코소보-세르비아-크로아티아의 인종청소, 아일랜드 전쟁,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 등 지구상의 모든 폭력적 살상과 전쟁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누가 기독교를 ‘평화의 종교’라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기독교는 공적으로는 평화, 십자가, 사랑과 자비를 표방했지만, 역사 속의 기독교는 ‘전쟁 종교’와 ‘폭력 종교’라는 야누스의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용서와 화해의 기독교가 왜 전쟁과 폭력의 종교가 되었을까? 그 신학적 기원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첫째, 하나님 상(image)과 폭력의 상관성에 뿌리가 있다. 기독교의 중심축인 서방교회가 고백한 삼위일체 하나님 상은 다분히 군주적 신이었다. 현대 신학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타자를 지배하는 인간, 자연을 정복하는 인간의 이면에는 전능한 힘과 신적 절대 주권으로 세계를 일방적으로 통치하는 신관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본성적으로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한다. 인간의 행위 이면에는 인간의 의식 속에 간직된 상(image)의 힘이 작용한다. 폭력적인 아버지가 의식의 심층 속에 각인된 자녀는 힘을 무절제하게 사용하는 아버지의 형상을 본받아 그러한 행위를 닮아간다. 그래서 몰트만은 인간사회의 지배와 정복을 멈추고 타자를 향한 억압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한 신학적 대안으로, 유일독점적이고 통치적인 서방교회의 군주적 신이 아니라 동방정교회 신학에 간직된 상호순환적(perichoretic)이고 친교적인(communal) 삶으로 풍요한 삼위일체 하나님, 다시 말해 ‘사회적 삼위일체’(social trinity)를 제시한다. 인간사회는 신의 형상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인간사회의 원형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사회에 반사해 주어 죄 된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영감을 준다는 것이다.
둘째, 근본주의 기독교와 전쟁 및 폭력의 상관성을 질문해야 한다. 기독교는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인가, 호전적인 종교인가? 서구의 관점에서 이슬람은 가장 반문명적이고 폭력적 종교라는 선입견으로 각인되어 왔다. 물론 9.11 테러를 비롯한 지구상에서 일어난 끔찍한 폭력적 테러행위가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해 저질러진 역사 중 하나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 근본주의 역시 그에 못지않은 전쟁과 폭력의 역사를 남겼다. 아마르티아 센은 『정체성과 폭력』에서 근본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굳건하게 표방할수록 폭력의 악순환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견고한 종교적 정체성으로 무장된 그리스도인일수록 타자에 대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피랍된 그리스도인 청년에게 순교를 당할지언정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분명 야만의 종교이고 반문명적 종교다. 지난날 전쟁이 발발했을 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얼마나 극단적인 호전성과 폭력성을 보여주었는가? 이슬람 국가를 향한 전쟁을 시작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전쟁의 승리를 위해 애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은 경건의 옷을 입은 적대감 및 전쟁 욕망과 다를 바 없는 호전적인 기도의 행위였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을 진멸하라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 자신들과 다른 이질적인 사람들을 배타시하고 배척하는 안경을 벗어 던지고, 관용과 포용의 눈으로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한다.
셋째, 타자성의 시각에서 다른 종교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낯선 이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행위를 그쳐야 한다. 주체 중심의 관점은 우리 안의 타자를 추방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근대의 주체성 원리는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 이후 “나는 정복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전환되었다. 서구 유럽의 기독교는 신대륙의 발견을 통해 비유럽의 원주민을 학살하고 정복하여 그들의 영토를 점유하고 확장해 나갔다. 주체는 타자를 배제하고 대상화한다. 기독교는 선교라는 명목으로 타민족과 국가를 침탈하여 식민지 정복의 기회로 삼았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기독교가 폭력과 전쟁의 종교가 아니라 평화의 종교가 되려면 관용과 다양성을 함양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는 강압과 무력의 선교가 아니라, ‘인디오의 수호자’로 아메리카에서 평화의 포교 활동을 펼친 라스 카사스(Las Casas)처럼, 교화(敎化)와 모범의 선교를 본받아야 한다. 국가 간의 전쟁이 발생했을 때면, 아무 생각 없이 “이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의 전쟁이다.”라고 설교하면서 중보기도에 열을 올리는 광신적인 태도로부터 회심해야 한다. 교회의 설교와 성경 읽기가 얼마나 반평화적이고 반복음적인 전쟁 이데올로기로 관행화되어 있는지 자성해야 한다. 지구상의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원한다면, 가장 시급한 일은 그리스도인의 사고와 의식에 내재된 광신적인 폭력성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한스 큉(Hans Küng)의 유명한 경구를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평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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