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이스라엘 전쟁을 보는 당혹감
작년 9월 말에서 10월 초까지 이스라엘 서안지구 여행을 다녀왔다. 성경 속 이스라엘은 대부분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 해당한다. 여행 중 서안지구 주민들의 이동을 전면통제하는 이스라엘군을 보며 고통스러웠다. 필자가 출국한 바로 다음 날 하마스의 미사일 공격이 있었고, 지금까지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으로 가자지구 인종학살은 지속하고 있다. 중동 한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실존적 불안감은 이해되지만, 동거하는 이웃 민족을 말살하는 인종학살에는 일절 공감할 생각이 없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구약의 이스라엘에 감정이입하고, 교회를 신약의 이스라엘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오늘날 이스라엘의 민간인 학살을 보고 있자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가득 찬 구약성경을 읽는 것 자체가 불편해졌다. 1세기 전 히틀러에게 학살되던 유대인이 1세기 후 가자 주민을 학살하게 되었다.
모든 전쟁의 원인 : 인간의 자기사랑
기독교는 보통 ‘개인적 자기사랑’만 논의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사랑에는 개인적 자기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 자기사랑이 모인 집단적 자기사랑이 존재한다. 집단적 자기사랑은 다시 공동체 내의 계층적·당파적 자기사랑과 공동체 간의 민족적·국가적 자기사랑으로도 전개된다. 공동체 내의 전쟁(내전)은 계층적·당파적 자기사랑의 대립이 원인이고, 공동체 간의 전쟁은 민족적·국가적 자기사랑의 대립이 원인이다.
개인적 자기사랑의 전쟁 : 형법상 살인죄를 통한 통제(평화의 수단 ①)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6계명이다. 개인적 살인은 어렵고 어리석은 일이다. 2023년 살인죄로 기소된 사람은 565명, 10만 명 중 한 명이다. 개인적 자기사랑을 위해 다른 사람을 살인하면 나의 자기사랑이 물어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그래서 형법 250조의 살인죄는 개인적인 전쟁(살인)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제6계명의 실천, 개인적 평화의 수단이 되고 있다.
계층적·당파적 자기사랑의 전쟁(내전) : 민주주의 선거를 통한 해결(평화의 수단 ②)
신분 사회에서는 왕과 평민 간의 싸움이 있었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당파 간 싸움이 계속된다. 개인적인 자기사랑들의 욕망이 농축되고 증폭된 집단적 자기사랑은 상대 집단과 당파를 제거하려는 엄청난 살기(殺氣)를 뿜어낸다. 점잖고 인자한 표정의 교회 장로님, 권사님들이 단톡방에서 이런 살기를 열심히 실어나른다. 우리는 이 강력한 공동체 내의 살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근대 입헌 민주주의는 계층적·당파적 자기사랑의 대립을 정당과 선거제도로 흡수해 ‘총탄’(bullet)으로 죽이지 않고 ‘투표지’(ballot)로 싸우게 하는 평화의 무기를 발명해냈다. 이러한 근대 민주주의 혁명은 수천 년 이어온 내전의 살기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제6계명의 위대한 역사적 실천이다. 2024년 12월 느닷없는 계엄이 선포되어 계층적·당파적 자기사랑의 단말마적·위헌적 살기가 노출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헌법에 따른 계엄 해제와 책임추궁이 진행되고 있다. 계층적·당파적 자기사랑의 전쟁(살기)에 대한 입헌 민주주의 제도의 평화는 매우 흔들거리면서도,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국가적·민족적 자기사랑의 전쟁 : 국제적 질서(평화의 수단 ③)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이 가장 무력하고 가장 절실한 곳은 국가적·민족적 자기사랑이 부딪치는 전쟁의 현장이다. 국가 간 전쟁은 타 공동체의 사람을 죽이는 것에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게 하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애국적이고 영웅적인 것으로 찬양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과 정반대로, “살인하라!”가 전쟁의 계명이 된다. 나는 ‘정의로운 전쟁론’(Just War Theory)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6계명과 달리 “살인하라”는 전쟁의 계명을 너무 쉽게 정당화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현실의 이스라엘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 통제도 해결책도 막막해 보인다. 국가적·민족적 자기사랑의 전쟁에 대해서는 계층적·당파적 내전에 대한 민주주의 선거제도의 처방만큼 잘 작동하는 평화의 수단이 아직 없는 것일까?
그러나 꼭 그렇게 비관적이기만 하지는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디폴트 값을 어디에 두는가와 관련이 있다. 지금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순환되는 전쟁의 증오는 갑갑한 일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20세기 전반 1·2차 세계대전을 통한 전 인류적 전쟁의 역사에 비해, 20세기 후반 약 50년의 세계는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제외하고는 세계적인 차원의 대규모 전쟁이 거의 없었던 역사상 유례없는 평화 시대였다는 평가도 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의 냉전적 대립이 오히려 대규모 전쟁의 발발을 막고 공포 속의 평화를 유지케 하였던 것은 역사의 역설이기도 하다. 2차대전 후 마련된 국제연합체제가 완벽하고 정의로운 평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상호통제를 통한 상대적 평화의 유지 기능을 해왔다는 것을 저평가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다. 최근 전 지구적 기후위기 대응에 대해서도 유엔기후협약체제는 괄목할만한 국제적 협력체제를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50여 년의 평화에 피로해진 극우적 욕망과 민족적 대립이 커지고 있는 오늘이지만, 전쟁에 대한 평화의 국제적 메커니즘 강화는 비관적으로 포기할 일은 아니다.
세상은 어차피 악인들로 가득한 곳이니 전쟁이 없는 평화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적당한 희망과 이상주의적 권면만으로도 세상의 전쟁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에게는 소망이 있다.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와 역할에 적절한 성령의 지혜를 받아서 평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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