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2025년,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5년이 지났다. 반세기를 넘어 또다시 절반의 시간이 흐르며, 이 땅의 대다수 시민은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되었다. 전쟁 발발 당시 5세 이상의 나이로 참극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는 1945년 이전 출생자, 즉 80대 이상 인구는 5% 미만이다. 하지만 전쟁의 깊은 상흔은 세대를 넘어 지금도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폐허가 된 건물과 시설은 복구되었지만, 전쟁이 망가뜨린 사회적 몸과 의식에 새겨진 파열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여러 층위에서 벌어진 복합적인 전쟁이었다. 탈식민 해방공간의 격랑 속에서 서로를 부정하던 정치 세력들이 각축을 벌이는 와중, 6.25 남침이라는 방아쇠를 계기로 ‘동족’ 간의 잔혹한 살육이 펼쳐졌다. 이는 곧 지역 패권국들이 얽힌 ‘동북아전쟁’으로 전개되었고, 지구적 차원에서는 상반된 체제와 이념의 대립을 압축한 ‘세계내전’(Weltbürgerkrieg) 양상을 보였다. 전쟁의 원인과 전개, 결과는 한반도 내부 요인과 국제적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며, 이는 전후 세계질서를 구조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질서는 흔히 ‘냉전질서’라 불린다. 강대국 간 전면전이 없었다는 이유로 ‘오랜 평화’(long peace)라는 표현도 쓰인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유럽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세계무대를 조망하면 이 시기를 단순히 ‘냉전’이나 ‘오랜 평화’로 한정하기 어렵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전쟁의 불길이 멈추지 않았다. 전후방의 경계가 흐려진 가운데 살육은 전방위적으로 자행되었다.
한국전쟁은 ‘마을로 간 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공동체를 철저히 파괴했다. 마을의 터전은 폐허로 변했고, 친족과 이웃의 울타리는 산산이 부서졌다. 점령군에 협조했던 이들은 전세가 뒤바뀌며 폭력적 보복의 대상이 되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엉킨 혼란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충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사연이 고향을 등진 이들의 발길에 얹혔다. 추방된 사람들은 처단되거나 실종되었으며, 남겨진 이들은 연좌제의 공포 속에서 불안과 위협에 짓눌려야 했다. 주검으로 돌아온 이를 맞으며 흘렸던 울음소리조차, 불순분자로 낙인찍힌 주검 앞에서는 허락되지 않았다. 꺼이꺼이 삼킨 울음은 말없이 스며들어 그들의 삶에 지워지지 않는 응어리로 남았다.
현대 인류학자들은 추방되고 망각된 ‘전쟁 유령’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켜 왔다. 과거의 잔재와 억압된 기억을 단순히 은유나 문학적 상상으로 다루는 것을 넘어, 잔혹하게 죽임당한 채 망각된 실제적 존재로서의 유령의 출몰(haunting)을 탐구하고 있다. 권헌익은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을 민족지적 접근을 통해 다루며, 유령을 단순한 산 자의 심리적 투영이 아니라 생생하게 위협하는 존재로 기술한다. 이러한 연구는 기계론적이고 배타적인 합리주의 세계관이 배제했던 영역을 열어젖히며, 존재론적 경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 나아가 관계의 회복을 통한 화해의 서사를 확장한다. 이는 전쟁으로 죽임당하거나 실종된 이들을 애도하고, 살아남은 이들의 트라우마를 다층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이다.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는 일은, 산 자들의 사무친 이야기를 경청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매끈하고 일관된 이야기가 아니라 각기 다른 고통과 분노, 외면되어 온 신산스러운 사연들에 귀를 기울이는 기나긴 과정을 지나야만, 회복이라는 이름이 비로소 허락될 것이다. 모든 아픔이 치유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상실은 메울 수 없는 공백으로 남고, 어떤 미어진 삶은 끝내 풀리지 않은 매듭으로 남는다. 다만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떠나보내고, 그 빈자리를 품고 살아가는 법을 더디지만 배워 간다.
전쟁의 상흔이 새겨진 이 땅에서,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예수를 따랐던 이들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이들의 상처를 보듬으며 비통한 삶을 껴안았다. 교회는 때로 억눌린 고통을 풀어내고, 용기를 북돋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무대 뒤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절망 속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이들 곁에 머물며, 말씀을 붙잡고 소망 가운데 기도하고 격려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주류교회는 과학기술의 가속화에 편승하며 제 몸 부풀리기에 질주했다. 그 과정에서 희생자의 언어를 소환해 애도하고 정성스레 한을 풀어주는 민간의례와 문화적 실천은 미개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주술 신앙을 배척한다고 표방했지만, 종교적 권위를 빌미로 약자 위에 군림하려는 왜곡된 사술은 오히려 적극 활용되었다. 정작 독재정권과 군사적 폭력 앞에서는 침묵하고 굴복하면서 말이다. 이런 행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교회에서 세를 얻은 이들 가운데는 전쟁의 공포를 빌미로 위협과 저주를 쏟아내는 권력자의 주술적 망상 앞에서는 침묵하거나 쿠데타 세력의 궁정사제를 자처하면서 동조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작가 한강은 세계가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동시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빚어가는 이 세계는 어떤 그림일까. 폭력과 고통의 쇠사슬을 더욱 동여매는 지옥도일까. 음산하고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폭력에 맞서 따스한 온기로 세상을 치유하는 천국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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