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현재 세계 여러 곳에는 전쟁(이스라엘 VS 이란, 우크라이나 VS 러시아 등)이 장기간 이어지고 있고, 최근 한반도에도 긴장이 매우 고조된 상황이라는 세계 시민들의 우려 섞인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사람 사이’는 이러한 역사적 국면 속에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분별과 해석, 실천이 필요할지 해당 주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학자이자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으로도 섬기고 계신 조동준 교수님(서울대 정치외교학부)의 통찰을 통해서 그 지혜를 얻고자 한다.]
인터뷰어 : 석종준(서울대 캠퍼스 선교사)
일 시 : 2024년 12월 2일(월), 오후 3시.
장 소 :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연구실(311호)
석종준 : 교수님 안녕하세요. 지난 2018년 ‘평화통일을 위한 기독교 학문의 주제와 방향’이라는 주제로 ‘기학연’(기독교학문연구회) 추계학술대회를 성균관대에서 개최하였을 때 교수님을 주제 강연자로 모셨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어떤 연구를 주로 하시는지요.
조동준 : 첫 번째는 핵무기 확산 후에 국가 행동의 변화를 연구합니다.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국가는 보유 직후, 군사, 외교, 심지어 국내정치에까지 공격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다가 15년 정도 지나면 핵무기를 쉽게 쓸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상대하는 국가도 핵보유국에 대한 대응을 자제합니다. 두 번째는 국제기구 내 국가들이 정책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을 연구합니다. 국가는 자국 정책의제를 국제기구로 투영하여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고 이 움직임에 반대하는 다른 국가의 관여로 국제기구가 경쟁과 타협의 장소가 됩니다. 세 번째는 국제규범의 형성과 전파를 연구합니다. 국제규범은 국가행동이 적절 여부의 판단 근거인데, 국가들간 경쟁과 협력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집니다.
석종준 : 교수님께서는 학문 활동 외에도 다양한 사회봉사를 실천해 오셨습니다. 사회봉사에 관여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조동준 : 언론에 잠시 소개된 활동 가운데 지금은 대인지뢰피해자 구호와 관련 활동만 합니다. 사회봉사의 기회가 계속 찾아오는 듯해요. 하나님께서 연결시켜 주신다는 느낌이 있어요. 저의 관여를 원하신다는 생각이 나면, 그 일을 했습니다. 최근 5~6년 동안은 한 외국인 학생을 돌보았습니다. 인도 학생인데 이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에서 교수가 되었습니다. 제 연구실 제자가 아니라 어느 선교사님을 통해서 소개받은 다른 학교 학생입니다. 제 아내는 엄마와 같은 역할로 집에 초대하고, 요리를 준비하는 등 정서적 안정에 도움을 주고, 저는 학위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석종준 : 세계 여러 곳에서 참혹한 전쟁이 장기간 계속되고 있고, 한반도 긴장도 매우 고조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교수님은 이러한 상황을 어떤 구조적 원인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계시는지요
조동준 : 지난 30년 동안 인류는 경험하지 못했던 평화와 물질적 풍요를 누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놓친 부분이 있어요. 지구화의 과실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과 나라들이 있어요. 오히려 피해를 본 사람과 국가의 불만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는 지구화로 국경과 사람, 집단 간의 구별이 약해진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정반대 길이 생겼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합법적 이민자가 8%, 비합법적 이민자까지 포함하면 10%가 넘습니다. 그래서 본토인과 이주민 갈등이 발생했지요. 우리는 “이민자들과 같이 잘 살아야지”라고 생각하지만, 부딪혀 보니 불편하고, 그것이 증폭되어 갈등이 일어났어요. 국가 차원에서도 상호접촉이 증가하면서, 갈등이 증가했어요. 대표 사례가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입니다. 우크라이나 안에는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30% 정도였어요. 68%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사람들은 “말도 못 하는데 우크라이나 사람 맞아?”라고 생각하며 갈등이 계속 생겼지요. 따라서 이 전쟁의 핵심은 ‘내’가 어느 집단에 속하느냐와 관련된 싸움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반도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한민족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북한이 말하는 조선 민족의 지리적 범위와 우리나라 사람이 생각하는 한민족의 지리적 범위는 다릅니다. 즉 북한이 말하는 민족 개념은 북한 지역에 기반을 둔 예족과 맥족 중심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머릿속에서 한민족이 무엇이고 조선 민족이 무엇인가의 지리적 범위가 어딘가 지금 갈라진 부분이 보이거든요. 같이 한국말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한국말, 저쪽은 조선말이라 하잖아요. 이게 조금 더 가면 북한은 ‘코리안’이라는 이름을 안 쓸 수도 있어요. 북한이 지금 통일도 안 하겠다고 하잖아요. 이렇게 민족 개념을 분리하려는 본질은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이에요.
석종준 : 교수님은 현재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으로서 우리나라 통일을 위한 여러 연구 활동도 주도하고 계십니다. 현재 남북한의 위기 국면은 이전하고 다른 특징이 있을까요?
조동준 : 저는 큰 차이를 못 느꼈어요. 차이가 있다면 북한의 핵무기 정도인데요. 과거에 비하면 더 심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해외에서 남북한 위기를 심각하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낮다고 볼 수 있어요. 극단적 예로 1968년에는 북한의 무장 게릴라 수백 명 이상이 서울에 와 있었는데요. 그에 비하면 훨씬 덜한 국면입니다. 역사를 큰 흐름으로 보면, 남북한이 서로 무력통일을 시도하다가 이제는 별개 국가로 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분단 초기 남북한이 서로 무력 통일을 하려고 했지요. 북한은 무력통일을 할 능력이 있었고, 우리는 그런 능력을 갖지 못했었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1970년대는 양측의 무장력이 너무 세지니까 무력통일이 서로 어렵다고 사실상 합의에 이릅니다. 그때부터 사실상 두 개의 코리아는 이미 진행 중이었어요. 그렇게 고착되는 줄 알았다가 1990년대 우리는 잠시 쉽게 흡수통일을 할 수도 있다고 착각했었어요. 1990년대 북한은 정말 정권 존망 위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다시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게 되니까 흡수통일이 어려워지게 되었지요.
석종준 : 교수님은 우리 시대 대표적인 그리스도인 지성이시기도 합니다. 세상의 전쟁과 평화 담론과 기독교의 전쟁과 평화의 담론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요?
조동준 :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힘의 압도를 통해서 이룬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입니다. 대표적으로 현재 유엔 같은 거예요. 일(一)대 다(多), 즉 하나의 도발 국가를 다수 평화유지국의 압도적 힘으로 제압하는 방식이고요. 두 번째는 약간 인간의 본성에 관한 생각 차이인데요. 강한 쪽이 무력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믿음에 근거해서, 평화를 위해 어느 쪽도 압도적 힘을 가지지 않도록 균형 상태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유네스코가 추진하는 방식인데요. 전쟁이 상대방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서 시작된다는 가정 아래, 상호이해를 통해 전쟁을 막으려는 시도입니다. 한편, 기독교에도 크게 세 가지가 방식이 있어요. 첫 번째, ‘정전론’(just war theory)은 피치 못하면 무력 사용도 가능하다는 것, 만약 상대방이 평화를 깨뜨린다면, 전쟁을 막기 위하여 무력행사도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두 번째, ‘기독교 평화주의’(pacifism)는 복음서의 산상수훈 등에 집중하다 보면 예수님을 따라서 절대적 평화를 지향하는 쪽으로 가는데, 이러한 평화주의자가 기독교 내 20%는 되는 것으로 압니다. 세 번째, ‘성전론’(holy war theory)은 한마디로 ‘우리’가 하나님 편이니까 ‘우리’ 무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인데, 시오니즘하고도 어느 정도 유사합니다. 지금 드린 말씀에 근거하자면, 세상에서 힘의 우위에 기반해서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쪽과 기독교의 ‘성전론’은 상대적으로 쉽게 결합될 수 있고요. 그다음에 세력 균형을 통해서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그 입장과 ‘정전론’이 약간 결합 될 수 있는 부분이 있고요. 마지막으로 서로 이해함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는 유네스코 방식은 기독교 ‘평화주의’와 연결이 가능하다고 보지만, 그렇게 선명하게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중 어느 것이 “무조건 맞다”라고 가르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최소한 여러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석종준 : 교수님은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전쟁과 평화라는 화두가 특별히 주목되는 내외적 국면을 어떻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보십니까?
조동준 : 저는 ‘기독교 평화주의’와 ‘정전론’ 사이 어디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둘 중 어느 것이 100% 맞다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이 입장에 맞추어서 평가해 볼 수는 있겠지요. 예를 들어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의 죽음으로 그리스도인은 모두 아파하죠. 하마스가 민간인을 학살하고 납치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가자지구 220만 명 중 민간인이 3만 8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과연 이러한 방식이어야만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밖에 없어요. 문제는 하마스가 가만히 있으면 죽어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그동안 하마스가 살아온 방식은 스스로 가자지구 내에서 재화를 만들어서 나누어 먹는 형태로 생존하지 않았어요. 가자지구의 고통을 본 주변 이슬람 사람들이 개인적 아니면 국가적으로 원조를 주었지요. 하마스는 1980년대 ‘이슬람 형제단’ 시절까지는 온건했는데요. 원조가 들어오면 하마스가 받아서 그것을 가자지구 사람들에게 나누어 생존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계속 평화협정을 맺으려는 비밀 협상을 합니다. 제일 먼저 이집트 다음은 요르단과 아랍에미리트연합이 국교 정상화를 했고, 전쟁 전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물밑 접촉을 했지요.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이 평화협정을 맺으면, 국가 차원에서 원조를 하마스에게 하지 못합니다. 하마스는 자체 생존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개인 차원의 선택으로 하마스는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 사람은 이스라엘에 가서 일하고 싶어 해요. 임금이 5배입니다. 이스라엘은 노동력이 부족하니까 가자지구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일하게 되는데, 점점 경제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의존된 사람들은 하마스로부터 멀어질 수 있어요. 이스라엘과 하마스간 전쟁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한쪽이 옳다 그르다 하기 전에 “도대체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행동하는가?”의 논리를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이번에 가자지구에서 가장 늦게 나온 한국인 선교사님들이 있어요. 그분들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는 거예요. 만약 해외 원조가 좀 더 생산적인 방법으로 계속 이루어질 수 있다면 거기도 변화가 생길 수 있을 거예요. 또 만약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지 않으시고 많은 경우처럼 사람의 손을 통해서 해결하신다면, 우리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진행하는 수순과 논리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 논리로 움직이는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이해해야,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대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석종준 :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전쟁과 평화’ 관련, 이러한 역사적 국면 속에서 어떤 분별과 지혜가 필요하고, 또 어떤 역할과 구체적 실천을 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조동준 : 그리스도인 시각이 가진 장점이 있어요. 기독교 평화주의자는 상대방을 포용할 수 있는 매력이 있어요. 이 매력을 활용해서 기독교 평화주의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시면 됩니다. 정전론자는 전쟁이 더 인도주의적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사회적 압박 활동을 벌이면 됩니다. 상대방을 평가하기보다 각자 자신의 믿음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먼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반면,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100% 이해하지 못해요. 불완전하기에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자성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재 여러 어려움은 우리 불완전성에 대한 자성 부족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로 오면서 인간이 존엄하다는 세상 논리 속에 매몰되어서 “인간이 불완전할 수 있다. 우리는 자성해야 한다.”라는 부분이 너무 약화 된 겁니다. 저는 현대 문명의 가장 큰 위기가 바로 이 점이라고 봅니다. 즉 ‘나’는 항상 옳을 수 있다는 교만을 극복해야 합니다.
석종준 : 그리스도인 정치학자로서 교수님은 연구하시고 강의하실 때 비그리스도인 학자들과 어떤 차별성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조동준 :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 불완전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느 한 편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자기 안전만을 고려하는 안보제일주의도 가지기 어렵습니다. 대신 소외되거나 피해를 받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는 전쟁을 연구하면서 지뢰 피해도 연구합니다. 통계적으로 한국에는 지뢰 피해자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만약 민통선 마을에 지뢰 피해자가 생겨 군 당국과 소송이 벌어지면 군부대가 해결하는 쉬운 방법은 못 들어가게 막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생계가 달렸기에 사람들이 그 지뢰 피해자한테 와서 “너만 조용히 하면 우리가 계속 농사지을 수 있어.”라고 합니다. 피해자를 보호해 주고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게 됩니다. 민통선 밖에서 발생하면, 그것이 일단 피해자 책임이라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는 1995년도까지 통계 자료에 지뢰 피해자가 없었어요. 이것을 가지고 한국 정부 대표는 국제사회에 나가서 “우리는 지뢰 피해자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사실하고 다르지요. 이러한 부분들이 제 눈에 들어오게 됐던 것은 통계 이면에 숨겨져 있는 부분을 보게 해주신 하나님의 관점, 제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가능했고, 이러한 것이 저의 큰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석종준 :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바른 분별과 지혜의 삶에 실제 도움을 주기 위해서 교회 지도자, 그리스도인 지성들은 어떤 안내와 섬김을 감당하면 좋을지요?
조동준 : 현재 한국 교회가 세속의 논리를 모르며, 세속의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추상적 대안을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세속과 관련된 쟁점이 언급되면, 교회가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크다고 보여집니다. 분명 기독교의 가치는 세속의 논리를 이겨내는 힘을 가졌는데, 기독교가 가진 힘이 느껴지지 못해요. 한국교회가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되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어요.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 교회의 힘을 생각해보면, 현재 한국교회에게 답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기독교인이 3%도 되지 못할 때, 한국교회는 신분차별을 없앴고, 근대 교육을 했고, 병원을 세우고, 남녀차별을 줄였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그 시기 자랑거리였습니다.
석종준 : 마지막으로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이 시대 청년 그리스도인들에게 당부하거나 강조하고 싶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조동준 : 저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내가 세상에서 기독교인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지킬까”라는 질문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치를 내가 세상에서 어떻게 구현할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라고 요구합니다. “지금부터 준비하라”라고 합니다. 많은 기독 청년이 기독교의 가치를 바로 구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좌절합니다. 저는 이 상황을 훈련으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훈련을 받을 때라고 합니다. 훈련 중 일상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물으면, 저는 “네가 좋은 기독교인으로 그냥 살아남기만 해도 괜찮다.”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각자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약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도 충분하다. 충분히 현재를 잘 살아가고 있는 거다. 하나님은 결국에 네가 준비한 것을 하나님께서 쓰신다. 그러니까 너무 지금 압박을 받지 말고 약간 공세적으로 미래를 보고 준비하자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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