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인생은 나 혼자 잘 뛰면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경주(競走)가 아니다. 인생은 나만이 아니라 나의 다음 주자들이 잘 달려줘야 승리하게 되는 계주(繼走)다. ‘바통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미국 계주팀을 두고 만들어진 말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세계적인 톱 수준의 역량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 대회에서 지난 30년 동안 미국은 계주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모두 한가지 이유, 바통 패싱에 실패한 때문이었다. 바통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바통 패싱 구간을 벗어나기도 하고, 바통을 주고받는 일이 꼬여 시간을 지체하기도 했다.
미국 계주팀의 실패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신앙의 계주에 많은 메시지를 준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급변하는 시대의 분위기, 쇠퇴하는 교인들의 신앙적 열정, 하나님을 삭제한 교육과 대중 매체들을 통한 비성경적 가치관의 학습 등, 우리의 영적 풍토와 기후는 이전보다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음 세대에 바른 믿음을 물려주는 것이 가능한가? 많은 교회 교육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좌절과 혼란을 겪고 있다.
아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뀐다 해도 다음 세대가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일에 대한 두 가지 본질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첫째, 세상이 어찌 바뀌든 시대가 바뀌는 양태만 다를 뿐 하나님을 등진 세상과 시대의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 뒤에 작전지휘 본부에서 호시탐탐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퍼붓는 사탄의 의도는 딱 한 가지다. 우리를 하나님과 갈라놓음으로써 파멸시키고(요 10:10a),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그분의 계획을 방해하려는 것! 그러니, 그 원수에게 우리의 믿음을 다음 세대가 물려받는 것보다 더 위협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둘째, 세상이 어찌 바뀌든, 시대가 어찌 바뀌든, 다음 세대에게 바른 믿음을 대물림하는 그 백성의 책임과 원리는 바뀌지 않는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2세대를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것을 명명백백하게 교훈하고 경고하셨다. 신명기 6장 4-9절이 그 핵심적인 메시지다. 우리가 우리의 다음 주자들에게 바른 믿음을 대물림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통해 주신 다음 세 가지 원리를 따라야 한다. 이 원리는 새로울 것이 없다. 우리는 신앙뿐 아니라 모든 삶, 모든 기술, 모든 직업을 이런 방식으로 전수받았고 전달하고 있으니 말이다.
첫째로 ‘먼저’의 원리가 있다. 무엇을 가르치기 전에 시범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는가? 신명기 4장 6-9절을 묵상하다 이 본문이 L자로 시작하는 영어 단어 4개의 기둥 위에 서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배우라(Learn)-사랑하라(Love)-살라(Live), 그리고 물려주라(Leave)이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다음 세대들에게 바른 믿음을 물려주기(Leave) 위해서는, 먼저 부모들이 앞에 놓인 세 가지를 실체적 삶의 모범으로 보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아는 데서 자라가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서 자라가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데서 자라가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람의 몸을 입은 예수님>이라는 교과서로 그들 앞에 세워놓으셨다. 우리를 통해 아이들은 하나님을 보게 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 것인지 보게 된다. 먼저 내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부모들이 꿰어야 할 첫 단추다.
둘째로 ‘같이’의 원리가 있다. 시범만 본 것으로 어떤 기술을 배울 수는 없다. 숙달된 선배와 같이 해보아야 배운다. 나만 아니라, 아이와 같이 배우고(Learn)-사랑하고(Love)-살아가는(Live), 삶의 현장이 가장 중요한 신앙 전달(Leave)의 학교가 된다. 나도 살고 자녀도 살고 가문도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에 목숨을 건 헌신을 같이 해 나가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다. 로이스와 유니게가 손자와 아들인 디모데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았으면, 그가 어떻게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겠는가? 둘째, 하나님의 날이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보다 복합적인 기독교 양육 훈련이 어디 있겠는가? 이 일이 소홀해지면 나와 내 자녀의 믿음이 뜨게 된다. 셋째,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이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들과 엮어 놓아야 내가 없어도 그들이 흔들거리지 않고 자라가고 살아갈 수 있다.
셋째로 ‘스스로’의 원리가 있다. 기생충이 있고 기생식물이 있듯이 기생(寄生) 믿음도 있다. 숙주(宿主)가 된 부모의 믿음에 뿌리를 내리는 믿음은 천만 위태로운 믿음이다. 구약의 요아스 왕 같이 되고 만다(대하 24:2). 모든 유기체는 그다음 세대가 더 강하게, 더 많이 살아 번성하는 것을 존재의 첫째 목표로 삼는다. 하물며 우리랴? 내 손주, 내 자녀들이 자신의 믿음의 손으로 예수님을 붙들고, 자신의 가슴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발로 주님을 따르는 독립 믿음으로 서게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들을 향한, 그들이 살아내야 할 세상에 끼칠 우리의 가장 큰 유산과 축복이다.
하나님 나라 전체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한국교회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는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다음 세대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우리 집만 책임지면 된다(수 24:15). 우리 집에서 ‘바통의 저주’가 일어나지 않도록, 아니 우리 집에서 멋진 계주가 계속되도록 책임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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