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기도와 감사(살전 5:16-18), 복음 전파(딤후 4:2) 만큼이나 성경이 언제 어디서나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명령은 자녀교육에 관한 것이다(신 6:4-9). 하나님의 명령을 삼가 순종하고 하나님 사랑하기를 자신의 마음에 새길 뿐 아니라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하는데, 이는 집과 길에서도 누웠을 때나 앉았을 때도 행해야 하고, 손목과 미간, 문설주와 문에 기록하고 상기시켜야 할 정도로 중요할 뿐 아니라 전인적이고 포괄적이며 복합적인 실천이다.
사실 수학 선생님은 수학만 가르치지 않고, 교회 설교자도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해석으로 매주 복음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고 학생들을 그리스도께로 중매하고자 하지만 그것만 할 수는 없다. 가정에서의 교육은 더욱 복합적이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고, 그다음부터 인성교육, 도덕교육, 예절교육, 사회성교육, 시민교육, 문해력 교육, 지식교육, 양심교육, 지혜교육, 생활교육, 경제교육, 가치교육 등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는 이 모든 가르침이 하나님은 누구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통해 우리와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고, 그 결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어떠한 정체성과 소명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와의 긴밀한 연결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신앙교육의 넓은 범주 안에 포함된다.
자녀 양육은 중요할 뿐 아니라 폭넓은 지식과 역량, 복합적인 실천을 요구한다. 일반 교육철학자 넬 나딩스(Nel Noddings)는 흥미롭게도 가정 살림과 자녀 양육이 기하학이나 영문학을 배우는 것보다 덜 중요한가 물으며, 이를 학교 교육과정 안에서 가르쳐야 할 것과 그 방법을 제안했다. 그렇게 보니 가정 살림과 가정생활도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에 중요한 배경이요 내용이다. 실제적으로도 비유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자녀의 신체적 건강을 위해 어떤 식단과 습관을 형성해 갈 것인지, 청소년 자녀를 위해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 자녀는 돌봄을 받기만 하고 부모는 돌보기만 할 것인지 가정에서의 역할 배분은 어떻게 할지, 우리 가정은 말 그대로 핵가족이 될 것인지, 가족 구성원뿐 아니라 낯선 이를 환대하는 공동체가 될 것인지, 대화에는 어떤 언어가 사용되고, 어떤 소재의 대화가 육성되도록 할 것인지, 여가나 가족 휴가는 우리만을 위한 즐거움과 소비와 보상인지 다른 무엇을 더 의미하는지 등 교육과정을 디자인하듯, 실내 인테리어를 구상하듯 배우고 고민할 것이 많다.
이는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가 교육을 ‘가르치고 배우는 집’(pedagogical home)을 짓는 것이라 비유한 바와 같다. 가르친다는 것은 배움 기간에 교수자와 학습자가 함께 거주하며 살아갈 가정을 만드는 것인데, 그 가정이 공유한 리듬과 삶의 양식에 맞추어 살다 보면 거기에 담긴 이야기, 상상, 질서를 내면화하게 된다. 곧 이웃과 세상을 보는 관점, 서로를 대하는 태도, 사회와 문화에 관여하는 방식, 삶의 목적과 지향, 특정한 종류의 사랑이 형성되는 것이다.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는 모든 가정에는 영적인 벽지와 배경 음악이 있다고 했다. 우리 가정에 흐르는 음악, 영적인 벽지의 색깔, 가정 삶의 리듬은 하나님의 나라의 그것들에 잘 조율되어 있는가? 혹시 지나친 개인주의와 성공주의, 소비주의 등에 조율되어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공동체를 위한 관심, 자족함, 공정거래와 의식 있는 소비에 조율되어 있는가? 성령의 열매가 주는 에토스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에 조율되어 있는가, 아니면 세상이 덕이라고 고쳐 말하는 허영, 시기, 나태, 탐욕, 분노, 식탐, 정욕과 같은 악덕에 조율되어 있는가? 자녀가 우리 가정에서 10년, 20년, 30년을 함께 거하며 살아가면, 신앙과 세계관 및 진선미에 대한 어떤 감각을 형성하게 될 것인가 상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가정은 ‘다공성 경계’(porous boundaries)를 가진다. 핵가족인 우리 가정은 속되거나 악한 것은 어떤 것도 못 들어오도록 화염검을 든 천사가 둘러 지키는 에덴동산이 아니다. 세상이 밀려 들어오고 부모와 자녀가 세상에서 살아간다.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청년이 되어 자녀가 교회를 떠난 한 부모가 “세상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악했고, 더 험하게 자녀의 삶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부모도 바뀐다. 자녀로 인해 혹은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인해 어떤 신앙과 삶을 어떻게 전수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부모의 사회적 상상이 변화한다. 교회 역시도 자유, 평등, 인권과 같은 민주적 가치는 소중히 여기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도덕적 절대성과 같이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문화적 감수성에는 걸림돌(stumbling block)이 되는 가르침은 희석해 버리거나, 교회 프로그램에 흥미와 적실성을 더하기 위해 문화와 기술을 과감히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과 문화전쟁을 하느라 세리와 과부와 죄인을 위한 환대를 잃어버리는 등 자녀를 위한 부모의 치열한 싸움을 지원해 주지 못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가정에서의 신앙교육 실천의 복합성은 하나님 나라에 조율된 가르치고 배우는 가정을 꾸리는 것만큼이나, 거칠고 매혹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세상만큼이나, 문화에 길들여지거나 문화 전쟁으로 치우쳐진 교회만큼이나 우리 자녀 내부에 기인한다. 경계성 지능,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 경계성 성격 장애, 틱장애 등을 가진 자녀의 부모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평생 당당하게 살아온 부모, 인지적인 한계를 느껴보지 못했던 부모, 누구의 속도 한번 안 끓여 본 듯한 부모들이 자녀로 인해 한계와 수치와 작아짐을 경험한다. 거기다 폴 트립(Paul Tripp)이 말하듯 자녀 안에 있는 영적인 교만과 어리석음이 그들 밖에 있는 세상의 유혹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체감하기도 한다. 심리나 교육 전문가가 아니지만, 이제 부모는 장애와 늦됨, 치료적 개입과 교육적 개입, 뇌의 문제와 죄의 문제 사이에서 분별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 또한 권위를 외면하며 자아충족적인 존재이기를 소망하나 사실은 한없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게 매 순간 주님의 영광과 사랑, 마음의 어리석음과 죄를 보여주며, 용서와 복음과 지혜를 나누어 주는 대화를 해야 한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말할 수 없이 복합적인 실천이다. 주님의 은혜와 심사숙고하는 실천이 필요한데, 5월에는 무엇보다 주님을 신뢰하는 데서 오는 부모를 위로하고 쉴 수 있도록 자기 시간을 내주는 교회의 이모, 삼촌, 어르신이 필요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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