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위기의 가정, 말씀과 사랑으로 회복하기
- <펜트하우스> vs. <미세스 다웃화이어>
가정의 위기는 현실이 되고
<펜트하우스>(2020)라는 드라마가 방영되던 때 시청자들은 여러 면에서 반감(反感)을 느꼈다. 시청자들은 드라마가 가상의 세계라는 전제 속에서 펼쳐진다는 점을 동의한다. 그럼에도 드라마에 몰입하게 되면 종종 호기심과 대리만족을 하게 된다. 그러나 드라마 안에서 보여지는 삶의 의미와 가치관을 모두 인정할 수 없는 시청자들은 반감을 갖게 된다. <펜트하우스>는 상류사회의 가정을 소재로 하였는데 그런 면에서 호기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여기서는 가정의 문제로 접근하고자 하는데 이 작품은 한국적 부모와 가정을 대변한다고 하겠다.
드라마 속 부모들은 성공지향적 인물들이다. 자녀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자녀가 잘되기 바라는 마음은 인지상정인데, 그 정도가 지나치다. 그래서 자녀들은 부모의 과도하거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데,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왜곡되어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아빠찬스, 엄마찬스, 부모찬스라는 희안한 용어들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일부 정치인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가정이 미디어에 폭로, 비판되는 등 사회문제화되기도 했다.
부조리극 같은 현대 가정
문제는 우리 시대의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관계가 전통적인 역할로 기능하기보다, 상당히 기능적, 실용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펜트하우스에서 보여준 것처럼 부모는 자녀에게 돈으로 해결한다. 자녀에게 사랑으로 품어주고 가르치기보다, 돈으로 해결한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모두 사주고, 사설 학원에 보내고, 그야말로 영혼 없는 물량 공세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으로 성장하는데, 현실에서 부모와 함께 한 식탁에 앉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부모의 라이프스타일이 그렇게 변해가고, 이에 따라 자녀교육이라는 대명제는 뒷전이다. 가정교육의 아웃소싱이다. 이때 자녀들의 마음은 공허하고 관계는 겉돌게 된다. 부모와 자녀는 이런 가정에서 서로 투명인간 취급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냉정하게 말하면 가정이라기보다, 껍데기만 남은 역할극의 무대라 해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 펼쳐지는 부조리극(The absurd theater)이 우리 현실 속에 이렇게 재현될 줄은 예전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껍데기만 남은 가정의 자녀
<펜트하우스>에서도 그러하지만, 자녀들은 부모의 과도한 욕심과 욕망에 희생당하게 된다. 절망하고 숨쉴 수 없는 상황 속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상징적 장면이 <죽은 시인의 사회>(1990/2021)에서 보여진다. 이 영화는 관습화된 교육 현실, 학생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 교육 현실을 비판한다. 학생들이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는 교사에게 끌리고 급기야 책상 위로 올라가 환호하는 장면은 시대적 명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한 학생은 성공한 아버지의 절대적 기대와 요구, 그에게는 가부장적 명령! 결국 죽음으로 내몰린다. 자신을 거부당한 자녀의 비참한 선택이 우리 시대에도 여기저기에서 절규하고 있다.
사랑 안에 회복의 길 있다!
<미세스 다웃화이어>(1994, 로빈 윌리암스)는 재미있고 유쾌하다. 한 단란한 가정, 엄마는 성격적으로 강성인 캐리어우먼이다. 반면 아빠는 아이들 키우며 가사 일을 돌보는 가정형. 그런데 엄마는 아빠를 무능하다고 거센 잔소리를 하며 거리로 내몬다. 여기서 가정의 아픔이 있는 듯하다. 아빠는 가정을 사랑하기에 떠날 수 없다. 그리하여 가정에 가사도우미로 위장 취업하고 아이들을 안심시킨다. 아빠의 사랑으로 이뤄진 아름다운 역전극. 아빠의 사랑이 자녀들을 끌어안고 불안을 해소해 주며, 가정을 새롭게 세운다. 결국은 해피엔딩. 아이들은 사랑의 안온함 속에 행복해하며, 아빠는 자신의 역할에 보람을 느낀다. 엄마는 더 이상 아빠에게 돈 벌어오라고 소리치지 않으며 마음을 돌이킨다. 엄마의 웃음이 돌아온다. 인생의 아기자기한 여러 요소들이 빚어내는 일상의 행복 드라마이다.
모든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펜트하우스처럼 화려한 상류가 아니어도, 특수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함께 웃고 울며 가정의 아름다운 연합과 행복을 만들어가는 가정! 무한경쟁으로 위협받고, 무한 성공으로 벼랑에 내몰리는 지금 시대에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일까. 가정의 역할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사회화(socialization), 문화화(enculturation)인데 위기의 현대 가정에서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라 하겠다.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한 ‘인간의 조건’(conditio humana)을 가정에서부터 가르치고 익히도록 해야 함은 의심할 바 없으리라. 이제 시간이 없다, 바쁘다는 변명은 핑계일 뿐이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였던 교육은 집안에서부터 율법을 암송하고 그것을 실천하게 했다. 율법의 생활화는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정신이 결집되어 있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가르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따라 가정에서부터 신앙교육, 기독교 교육이 시작되어야 한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모든 교육은 성경 말씀으로부터, 모든 가정에서 말씀이 가르쳐지도록 애쓰고 힘써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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