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최근 한국 사회는 비상계엄으로 인한 탄핵 찬반, 세대갈등, 젠더갈등, 이념갈등, 계층갈등 등 다양한 차원의 복합적 갈등이 만연한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갈등은 단순히 사회적 현상을 넘어 공동체 내부의 신뢰 기반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특히 갈등의 회피나 정치적 도구화 경향은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사회적 치유와 회복을 위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다양한 사회적 갈등 국면 앞에서, 필자는 그리스도인이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개념을 통해 신앙과 삶의 통합적 실천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회복적 정의는 전통적인 응보적 사법 체계가 지향하는 처벌 중심의 접근을 넘어, 관계의 회복과 공동체의 온전한 회생을 목표로 하는 정의 개념이다.
성서에서 정의는 단순히 법적, 도덕적 정당성을 넘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및 인간 공동체 내부의 관계를 치유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재건하는 총체적 과정과 직결된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사건(마 9:10-13)은 단순한 죄 용서 선언을 넘어, 당시 사회에서 배제되었던 이들을 다시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으로 회복시키려는 실천적 행위였다. 마태복음 20장에 오후 5시에 온 품꾼에게 하루 일당을 지급하는 포도원 주인의 마음은 단순한 분배 정의나 능력주의(Meritocracy)를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적 정의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누구나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누릴 수 있는 천부인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평생 먹을 양식’을 쌓아놓고 살아가는 소수의 탐욕으로 절대다수가 최소한의 양식조차 구하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회복적 정의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기반한 실천적 사랑과 공동체 회복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서로를 돌보고 재산을 공유하며 당시 로마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에 대항하는 대안적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4세기 가이사랴의 교부 바실리우스는 ‘공동의 부’(common wealth) 개념을 강조하며, 가난한 이웃의 기본적인 권리를 외면하는 부유층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의 구제 사역은 단순한 자선 행위를 넘어, 사회 구조적 불의에 맞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로운 돌봄을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 스승이자 밀라노의 감독이었던 암브로시우스도 교회 재정의 절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와 선교를 위해 사용해야 함을 강조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전체주의 체제에 저항하며, “교회는 고통받는 자의 옆에 서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시대의 불의와 고통에 침묵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정의를 실천해야 할 신앙의 공적 책임을 분명히 했다. 20세기 후반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이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 활동 등은 억압과 갈등으로 파괴된 공동체를 치유하고 회복하려는 교회의 실천적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불의와 억압 앞에서 회복적 정의를 실천한 전통은 구한말과 일제 치하의 한국교회를 통해서도 면면히 이어져 왔다. 1970-80년대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민주화 운동, 농촌 목회, 도시 빈민 운동 등에 참여했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억눌린 자들과 함께 고난받으며 시대의 정의를 실천하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회적 갈등과 경제적 양극화의 현실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 제시보다는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목소리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이며 공적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이 지닌 공적 책임과 사회적 치유자로서의 기능이 축소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회복적 정의는 갈등 상황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사과와 용서, 책임과 화해의 과정을 통해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갈등을 단순히 정죄하거나 회피할 대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회복적 원리를 실천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비난과 단죄보다는 경청과 이해를, 분열과 대립보다는 연대와 상생을 선택해야 한다. 교회는 고통과 상처가 있는 사회적 현장으로 나아가야 하며,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상처 입은 이들을 위한 공동체적 치유와 회복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의 공적 책임이며, 복음의 총체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처벌을 넘어 관계의 회복과 공동체의 온전함을 지향하는 회복적 정의의 실천을 통해, 교회는 상처 입은 세상을 치유하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공동체로 거듭날 것이다.
일제와 한국전쟁, 그리고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생존을 위해 투쟁적으로 살아온 기성세대로서는 회복적 정의와 평화를 모색하는 자유로운 토론이나 공론의 장이 불편하거나 어색할 수밖에 없다. 교회 안에서도 별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대학생과 청년을 비롯한 다음 세대를 위해선 공의로운 사회를 향한 치열한 고민과 토론, 공론의 장을 통한 대안과 비전 제시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광장’(ἀγορά)을 마련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매스컴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토론과 숙의를 통해 공공선을 추구하는 성숙한 시민사회를 만들어야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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