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국민 모두를 경악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작년 12.3 비상계엄, 그리고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온통 몸살을 앓았다. 그간 국가 단위의 갈등이나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행정수반이 입법기관을 찬탈하려 했던 시도는 대가를 치르면서 민주화를 이룬 다수의 시민에게는 상상치도 못할 역사적 후퇴였다. IMF가 경제적 국가비상사태였다면, 12.3은 정치적 국가비상사태였다. 이후 탄핵과 경선, 대선에 이르기까지 광장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평소 ‘민주화 세대’라고 자부하며 “요즘 애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라고 혀를 차던 어른들은 추운 칼바람에도 망설임 없이 응원봉을 들고 은박지를 두르며 밤새 광장을 지킨 2030 젊은이들을 보며 놀랐고 기뻤고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왜 다 ‘젊은 여자들’뿐이냐며 대한민국 청년 남자를 ‘싸잡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훈계의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이 현상을 읽는 독법은 간단하지 않다. 사실 ‘2030 여성’은 젠더화된 성차별 의제를 공적 담론으로 제기할 수 있는 축적된 ‘역사’가 있었다. 무엇보다 5천 년 가부장제가 꾸준히 여성에게 행사했던 부당함과 불평등의 압도적 무게가 있고, 그 제도가 후기-근대적 상황에서 동력을 멈춘 후 약화하는 구조적 변화 과정에 있다는 사실도 ‘호기’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경험한 광장의 연대 투쟁 누적치도 ‘그녀들’의 공적 참여와 발화에 용기를 주었다. 더구나 시위 문화를 축제로 바꾸며 소위 ‘K-시위’라는 유행어까지 만든 ‘응원봉 시위’는 1990년대 이후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꾸준히 공유되어 온 ‘아이돌 응원 문화’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무슨 말인가? 지금 광장의 저항에 거의 부재했던 ‘이대남’의 편을 들어보겠다는 건가? 딸뻘의 시민들이 너도나도 자신이 응원하는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나타나자 덩달아 응원봉을 주문하거나 자체 제작한 어른들도 있지 않았나? 동시대 같은 연령인데, 왜 ‘2030 남자들’은 즉각 연대하지 않았나? 오히려 광화문과 여의도에서 모인 극우화된 반탄 집회에서 선봉장의 역할을 하고 서부지법 폭력 사태에 앞장선 사람들은 ‘2030 남자들’이 아니었나? 십분 양보하여 그들이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확산하는 매체에 의해 과대 대표화 되었다고 치자. 그럼, 이번 대선에서 보여준 극명한 ‘반민주당’ 정서는 어떻게 설명할 건가? 방송 3사 출구 조사에서 20대 여자 58.1%가 민주당 후보를 선택한 것에 비해 남자는 24%뿐이었고, 36.9%는 국민의힘 후보를, 37.2%는 개혁신당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나? 이렇게 정량 지표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현재 대한민국 청년 남자들이 보수화되었다는 것에 어찌 반론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60~70대가 빨갛고 40~50대가 파랗고, 동이 빨갛고 서가 파랗고, 2030은 남자가 빨갛고 여자가 파랗다”라는 지표는 단순화하여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민주당을 지지했던 ‘2030 딸들’이 “어머니 아버지, 저속노화 실천하시면서 오래 사세요!”라며 부모의 건강을 살피더라는 4050 부모들의 너스레가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갈라치기가 놓친 ‘사이 공간’에도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이 실존한다. 그들의 의미가 이항대립적 담론 안에 ‘폭력적으로 묻혀’버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이승윤 교수는 최근 “녹아내리는 노동, 연대가 어려워진 청년들”*이라는 글에서, 지난 20년간 가속화된 ‘액화 노동’**의 현실이 같은 ‘청년’ 세대임에도 젠더 기대와의 교차성에서 보이는 차이에 관해 유의미한 지점을 포착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고용/소득 구조에서 ‘프레카리아트화’***하고 있는 경험이야 젊은이라면 남녀 모두 겪는 현상이지만, 젠더 축을 교차해 보면 남성의 좌절과 무기력 및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 지표가 같은 연령, 같은 계층적 상황에 있는 여성보다 급격하게 상승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여전히 문화적 압박감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주 부양자로서의 남성’이라는 젠더 역할이 고용 불안정 상태와 만날 때 훨씬 증폭된 불안과 불만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만이 원인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분명 끄덕여지는 지점이 있다. 결국, ‘이대남’은 가부장제는 끝났고 가부장의 기대는 남아있는(적어도 그렇게 느끼는) 사회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이중의 불안과 불합리를 ‘읽어주지’ 않고, 굳이 ‘여자 편’을 들고 있는 특정 정당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된 것은 아닌지? 물론 이 역시 싸잡아 평가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민주화를 이룬 세대의 아들과 딸이,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이렇게나 생각이 다르고 지지의 지형도가 갈라진다면, 혹은 사이의 의미들이 공적 담론 안에서 안전하게 발화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민주주의의 실패이다. 우리 사회의 후속 세대인 젊은이들이 동의하지 않는, 신뢰하지 않는, 혹은 분노하는 지점은 무엇인지? 실은 그걸 묻고 듣는 것부터가 우리가 민주사회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시작점이지 않을까?
* <광장 이후>, 문학동네, 2025.
** ‘액화노동’이란 전통적 고용관계의 경계가 녹아내리며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을 의미한다.
*** 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불안정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 계층을 지칭하는 신조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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