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영국에서 벌어진 노예무역 폐지 운동은 단순히 악습 하나를 없애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도덕·종교·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혁명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프랑스의 격렬하고 유혈이 낭자한 혁명과는 달리, 이 운동은 비폭력적 방식으로 대중 정치의 장을 열고 영국 사회의 도덕적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역사학자 허버트 슐로스버그(Herbert Schlossberg)는 이러한 변화를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이라 불렀으며, 이는 영국의 정치 윤리와 제도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영국의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가 있었다. 그는 종교적 신념을 토대로 도덕 개혁과 노예무역 폐지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윌버포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하며 정치적 야망을 키웠고, 젊은 나이에 하원에 입성해 요크셔의 대표로서 성공적인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25세 때 유럽 대륙을 여행하던 중 경험한 ‘회심’은 그의 인생과 정치 철학을 근본적으로 바꾸었고,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윌버포스는 처음에는 정계 은퇴를 고민했지만, 친구이자 수상이었던 윌리엄 피트(William Pitt)의 설득으로 정치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후 그는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복음주의적 신앙과 정치적 실천주의를 공유하는 ‘클래팜 파’(Clapham Sect)를 형성했다. 클래팜 파 정치가들은 특정 진영에 얽매이지 않고 도덕적 신념에 따라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며, 실제로 이 운동은 클래팜 파를 중심으로 보수세력 내 피트 파와 진보 성향의 폭스 파가 협력하는 독특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이후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반노예제 정책이 유지되는 배경이 되었다.
노예무역은 당시 영국 경제의 핵심이었다. 영국은 18~19세기에는 대서양 노예무역의 40% 이상을 장악했으며 특히 서인도제도에서 설탕 산업에 투입된 노예노동력은 영국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주었다. 당시 많은 사람은 노예제를 도덕적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다. 노예는 재산으로 여겨졌고, 이를 폐지하는 것은 곧 재산권 침해로 여겨졌다. 더불어 프랑스 혁명 이후 반노예제 운동은 급진적 사상과 연결되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윌버포스와 동료들은 전략을 수정했다. 이들은 감정적 호소 대신 노예무역에서 선원 사망률이 높다는 점과 임금 노동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식의 경제적 논리를 제시하며 점차 여론을 변화시켜 갔다. 그런데도 노예무역 폐지법안은 1789년부터 1807년까지 11차례나 부결되었는데 이런 교착 상태를 돌파한 것은 대중의 힘이었다. 1792년부터 클래팜 정치가들의 활약으로 전국적인 반노예무역 대중집회가 열렸고, 유권자들의 압박은 1806년 총선에서 노예무역 폐지를 공약한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1807년 2월 하원 표결에서 283대 16이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노예무역 폐지법이 통과되었다.
1807년 법안이 통과되는 국면에서 노예무역에 대한 찬성 및 반대 담론이 수행한 역할을 비교하면 이 운동의 성공 원인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다. 친노예무역 담론이 기득권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 집중한 반면, 반노예무역 주장은 단순히 악습을 폐지하자는 수준을 넘어 영국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재정의하고 새로운 사회적 비전을 제시했다. 이는 프랑스와의 체제 경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더 명확히 이해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한때 노예무역 및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면서 이를 부활시켰다. 프랑스의 침략 위협이 고조되던 당시, 노예무역 폐지는 많은 영국인들에게 국가의 도덕적 위신을 회복하고, 프랑스에 대한 영국 체제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1807년 이후 진행된 윌버포스의 노예제 폐지 운동은 영국 사회의 갈등을 조율하고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1820년대까지 의회에서는 점진적 해방이냐, 즉각적 해방이냐를 둘러싼 이견이 있었고, 1830년대부터는 노예 소유주에 대한 보상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점차 많은 영국인이 노예를 불법 취득 자산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노예 소유주에 대한 보상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졌지만, 이런 몰수방식이 이들의 저항을 극대화할 뿐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보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작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윌버포스는 서인도제도인 전체를 적으로 돌리기보다는, 보상을 통해 그들이 자발적으로 노예를 해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그는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절충적인 해법을 주장했고, 반노예제 진영 역시 노예제의 즉각적 폐지와 노예 소유주에 대한 보상이라는 현실적인 입장을 채택하게 되었다. 정부 역시 이를 수용하였고, 1833년 7월 26일 윌버포스는 노예제 폐지법안의 하원 통과가 확실하다는 소식을 들은 후,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우리 사회 안의 불의와 불평등이 높은 지위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윌버포스와 그의 복음주의 정치가 동료들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리에 오르냐보다 기독교적 가치를 어떻게 정책에 반영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반노예제 운동은 종교성과 정치적 이해관계라는 상반되어 보이는 두 요소를 통합하여, 그 공통분모의 최대치를 실현한 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취급방침 | 공익위반제보(국민권익위)| 저작권 정보 | 이메일 주소 무단수집 거부 | 관리자 로그인
© 2009-2025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고유번호 201-82-31233]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56길 8-13, 수서타워 910호 (수서동)
(06367)
Tel. 02-754-8004
Fax. 0303-0272-4967
Email. info@worldview.or.kr
기독교학문연구회
Tel. 02-3272-4967
Email. gihakyun@daum.net (학회),
faithscholar@naver.com (신앙과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