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지난 6개월 동안 우리 사회는 유례없는 정치적 양극화를 경험했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대한민국의 사회갈등지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 갈등이 비상계엄이라는 기폭제를 만나 겉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을 뿐이다. 새로운 대통령은 ‘국민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언급했지만, 그 말이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통합을 방해하는 근본적 원인에 대한 진단이 필요하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 우리 사회에, 또 교회에 강력한 도전을 던진다. 예언자들은 통합과 회복을 말하기 이전에 공동체의 ‘구조적 불의’를 직시하라고 요청한다. 훼손된 정의를 마주하여 치료하라고 말한다.
미가는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미 3:9)을 질타한다. 미가가 본 구조적 불의는 무엇일까. 지도자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고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그것이 정의인 체 했다는 것이다(미 3:11). 또 “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과 “축소한 가증한 에바”가 있음에도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미 6:10).
아모스는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고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암 5:7)에게 심판을 선포한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엘리트 지도층이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며”(암 5:11), 가난한 자를 “신 한 켤레를 받고 팔며”(암 2:6), 법정을 뇌물로 왜곡하는 구조적 불의를 보았다(암 5:12).
이사야는 포도원의 비유를 통해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사 5:8)을 저주한다. 하나님이 정의의 열매를 기대하며 가꾸신 포도원에서 포학과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을 보셨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당대 지도층의 토지 독점과 부의 집중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구조적 불의라고 보았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재단 숯으로 부정한 입술을 정화하는 환상을 경험하며 “나를 보내소서”(사 6:8) 한 것은, 왕궁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정의가 훼손된 것을 직시하고 지금까지 불의에 눈 감고 입 다물었던 것을 회개했던 것일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갈등도 단순히 정치 이념 충돌, 사상 충돌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의에 대한 구성원들의 인식 차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령, 부의 극단적 편중과 편법적 세습, 이를 정당화 내지 심화시키는 법령과 제도들, 권력층에 유리하게 해석되고 적용되는 듯한 사법 절차적 불공평, 국민과 난민의 기본적 인권을 현저하게 다르게 취급하는 법 현실 등을 “불의하다”라고 인식하는지, 아니면 “그 정도는 어쩔 수 없다”라고 인식하는지의 차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마주한 다양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은 구성원들이 함께 “공동체의 구조적 불의를 직면하고”, 나아가 다시 “정의를 물 같이”(암 5:24) 흐르게 하자고 결심하는 것이다. 불의를 직면하지 않는 통합은 갈등을 은폐하고 장기화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필자와 같은 법률가들은 무한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의 가옥과 전토를 빼앗던 방식은 무력을 통한 강제 수탈이 아니었다. 형식적으로는 적법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법의 결과를 낳는 재판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의한 지도층은 그 재판이 ‘정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먼저 법률가들이 구조적 불의에 정직하게 직면해야 한다. 합법의 테두리 안에 있지만 정의롭지 않은 재판절차와 판결 때문에 삶을 빼앗겨 온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건져낼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다만, “불의를 직면한다”라는 말을 그저 불의를 행한 자들에 대한 ‘혐오와 보복’, 또는 ‘심판과 처벌’로 치환하려는 시도를 주의해야 한다. 물론 많은 경우 사법적 단죄가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본질적 목표로 삼는다면 또 다른 갈등과 피해자를 낳을 수도 있다. 불의에 직면하는 것은 보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을 위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상대를 악마화하는 혐오의 언어, 편견의 언어를 자제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함께 ‘구조적 불의’에 관하여, 또 ‘회복해야 할 정의’에 관하여 대화할 수 있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 우선, 우리 사회의 각 영역에서 구조적 불의에 관한 다양한 사례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겠다. 구조적 불의를 당한 피해자들이 사회 전체의 공감과 위로를 경험하도록, 책임 있는 집단의 공식적인 사과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나서는 구조적 불의가 재현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이 과정은 구성원들 사이의 ‘새로운 정의’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다. 어떻게 하면 구조적 불의의 피해자들이 구제받을지, 또한 어떻게 해야 새로운 정의 때문에 역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이 없을지에 관하여 숙고하고 또 숙고해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심판과 처벌’보다 더 중요한 목표는 구성원들이 우리 사회의 다양한 구조적 불의를 정직하게 직면하고 정의로운 새 질서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싸매고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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