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2024년 12월 3일, 나는 서울대학교 학부 수업에서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가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비판한 바와 같이, 전체주의에 이끌린 사유의 부재는 홀로코스트라는 참혹한 역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를 교훈으로, 어떻게 교육을 통해 고유한 사유와 행위의 힘을 기를 수 있을지를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며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날 밤 마주한 계엄 소식으로 인해, 사유의 부재가 낳은 비극적인 역사가 우리 사회에서 반복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사회는 지난 몇 달간, 세대, 젠더, 이념, 계층 등 복합적 층위로 얽혀진 치열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극심한 피로를 경험해야 했다. 그동안 우리 안에 누적되었던 갈등이 충격적인 한 사건을 통해 우후죽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계엄 사건 이후에도, 이러한 사회의 이슈를 놓고 수업 시간에 명시적인 주제로 토론해 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최근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일을 상당히 조심스러워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견을 드러낼 때, 그것이 때로는 혐오나 비판을 받을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청년들이 많아진 것이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자도 이와 같은 심리적 부담을 안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드러내기에는 “안전하지 않다”라는 감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나는 여러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대학생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동체와 그렇지 않은 공동체 사이의 다소 명확한 구분이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안전함에 대한 감각’은 사회의 여러 요소와 연관되어 있으나, 특히 그들이 속한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체험하는 구체적인 관계들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청년들이 공동체를 향해 느끼고 있는 ‘안전함’ 혹은 ‘안전하지 않음’에 대한 감각은 우리 사회와 교육을 이해하는 중요한 정서적 지표가 될 수 있다. 먼저 이는 우리 사회에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타인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대화의 능력과 유연성이 크게 상실되었음을 보여준다. 본래 사회는 다양한 타인들과의 만남으로 이뤄진 복잡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이와 같은 ‘차이’의 문제를 대화와 토론으로 담아내지 못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곧장 치환해 버리는 담론 프레임이 팽배한 상황이다. 어린이, 청소년, MZ 세대, 노년층 등 서로 다른 세대에 대한 고정관념과 혐오 발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도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언제든 자신이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며, 자신을 숨기는 것에 익숙해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교육이 이뤄지는 좋은 토양이 될 수 없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만의 고유한 ‘탄생성’을 실현하는 것이 교육과 행위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침묵의 문화’에 익숙해질 때, 교육 활동 안에서 한 사람이 가지는 고유한 목소리는 억압되며, 그들의 관점과 삶을 펼칠 기회는 제한되고 만다.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의 가능성이 사라진 교육 현장은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와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민주적인 소통이 사라진 ‘닫힌 공간’이 되고 만다. 이러한 닫힘은 대화와 소통을 가로막는 실제적인 단절과 세대 단절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떠한 공동체가 되어야 할까? 지성의 전당으로 불리는 대학 캠퍼스에서도 청년들이 안전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교회 안에서는 어느 정도의 안전함을 느끼고 있는지 신중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토대로, 이 사회와는 다른 논리로 움직이는 새로운 공동체를 경험하는 장소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갈등과 대립으로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쉼을 줄 수 있는 공동체, 서로의 다름이 무차별적인 비난에 놓이기보다는 수용 받을 수 있는 공동체, 나와 너의 다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조화롭게 하나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신뢰하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영혼의 안전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안전함은 한 사람의 내적 성장을 소중하게 여기는 교회와 교육 현장 모두에 필수적이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 사람은 이 세계에 태어난 자신의 고유한 ‘탄생성’을 꽃피울 수 있다.
오랜 시간 생애사 연구를 수행해 온 질적 연구자로서 나는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청소년과 청년, 기혼 여성, 노년층 등 폭넓은 세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형성된 고유한 맥락과 빛깔을 그려볼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깨달은 점은 타인을 한 집단의 정체성으로 섣불리 규정할 때, 그들의 존재가 만들어진 고유한 삶의 맥락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갈등과도 닮아있다. 이제는 섣불리 혐오의 프레임을 씌워온 누적된 병폐를 인식하고, 타인의 구체적인 얼굴과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사회와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가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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