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나는 1990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기독교 대학생 운동의 절정기가 아니었나 싶다. 군사 독재가 막을 내리면서 학생운동은 조금씩 쇠퇴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복판에서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찾으려던 기독교 386 선배들의 발버둥은 마침내 일정한 결실로 이어지는 때였다. 기독교 동아리에 소속된 나에게 기독교 세계관은 처음에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종의 공기같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 공기에는 여전히 과도기의 혼란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아직 남아 있던 최루탄과 공권력의 폭력, 비장하거나 뜬금없는 복음성가, 극단적인 이원론적 기독교와 각종 이단 종파가 내뿜는 야릇한 냄새가 함께 섞여 진동하였다. 간발의 차이로, 나는 이전의 선배들이 가졌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큰 기대나 그 운동의 절박함에 동참하는 데 실패했고, 이후의 논의에도 끼지 못했다.
이후 네덜란드 남쪽에 있는 나라 벨기에로 유학을 하러 갔는데, 그곳에서는 천주교가 ‘기독교’이고 개신교는 종교탄압을 겨우 벗어난 소수 종파였다. 게다가 9년간 소속한 ‘복음주의’ 국제 교회는 복잡한 신학은 다소 무시하고 착하게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 분위기 덕분에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단어조차 거의 잊었다. 그 대신 30여 개국 이상에서 모여든 형제자매와 교제하면서 다양한 신앙의 모습을 경험했고, 하나님은 내가 이해한 것보다 훨씬 크신 분임을 실감했다.
귀국한 후에 다시 자연스럽게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접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도 하고 <신앙과 학문>에 논문도 발표했다. 한동대학교에 임용된 후에는 기독교 세계관 수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이런저런 경험 때문인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관찰자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학생 때 읽던 책과 저자들이 여전히 언급되는 것은 다소 실망스러웠고, 기독교 세계관의 틀과 고민이 복잡한 세계와 쇠퇴하는 기독교의 현실에 비해 너무 성기거나 지엽적이라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지성주의와 혐오가 기독교 세계관의 이름으로 포장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냉소적으로 될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몇 년 전부터 <신앙과 학문> 편집위원장직의 제안을 받았다. 경험 부족과 몸담은 대학의 업무 부담을 들어 응하지 않다가, 올해 들어 김태황 회장님의 강권에 덜컥 임무를 맡았다. 비자발적인 방식으로 관찰자에서 관여자로 정체성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3월부터 인수인계를 받고 지금은 6월 여름호 발간을 위한 실무를 처음 경험하면서 이런저런 좌충우돌을 겪고 있다.
관여자가 되고 나니 관찰자가 고려하거나 고민하지 않는 지점에 눈을 돌리게 된다. 우선 눈에 띈 것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다양한 열매 이면의 숨은 노력이다. 편집장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학회 임원진과 전임 편집위원장들, 간사님들의 수고가 얼마나 컸는지 실감했다. <신앙과 학문>이 수많은 기독학자가 함께 일구어 온 고민의 산물임을 알았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투고된 논문과 그 논문의 심사자 선정 과정을 거치면서 새삼 놀랐다. 자기 학문의 영역에서 성경적 관점을 고민하는 학자가 이렇게 많았다니.
동시에 이 에너지가 한국교회에 전달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도 크다. 이렇게 꾸준히 학문적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왜 교회는 정치적 편향과 문화적 퇴행의 대명사로 각인되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기독교 지성 운동의 측면에서 한국 교회는 30년 전보다 퇴보한 것 같다. 많은 성도가 책을 읽고 신앙과 삶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보다 SNS에 넘쳐나는 자극적인 억지 주장에 매몰되어 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가장 경계하는 이원론이 개인의 세계 이해 차원뿐 아니라 기독교 학문의 세계와 지역 교회가 이분화로도 드러나는 것 같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를 생각한다면, <신앙과 학문>은 여느 학술지와 다르고, 달라야 한다. 전문가들의 배타적인 논의 공간이 아닌 대중성과 학문적 수월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과제 때문이다. 먼저 대중성의 확보를 위해서는 주제의 선정부터 연구 결과의 서술 방식까지 교회와 일반 성도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학문적 수월성의 측면에서는 언젠가 학문 분야별로 좀 더 특화된 분야별 기독 학술지가 생기는 것을 꿈꾸어 본다.
중요한 임무를 맡은 이래 지난 몇 주간의 고민은 이렇게 아직 피상적인 관찰과 다짐에 머물러 있다. 그보다 급하고 당장 절실한 것은 기독 연구자 공동체의 도움이다. <신앙과 학문>은 가장 광범위한 학제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논문을 엄정하게 심사해서 한국연구재단과 일반 연구자에게 좋은 학술지로 인정을 받기가 훨씬 더 어렵다. 이 일차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더 많은 연구 결과를 <신앙과 학문>에 보내주실 것을 감히 요청한다. 특히 이공계 기독학자들의 도움과 헌신이 꼭 필요하다. <신앙과 학문>에는 크게 보아 신학, 인문 사회, 교육, 예술 계열의 논문이 많이 투고되고, 자연과학과 공학 분야의 논문은 별로 실리지 않는다. 기독교학술동역회에서 오랫동안 기독교 세계관을 고민한 과학자와 공학자 선배들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을 기대한다. 그런 노력과 희생을 통해 <신앙과 학문>이 그 학술적 위상을 유지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 운동, 기독교 세계관적 사유의 확산에 이바지하리라 믿는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취급방침 | 공익위반제보(국민권익위)| 저작권 정보 | 이메일 주소 무단수집 거부 | 관리자 로그인
© 2009-2025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고유번호 201-82-31233]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56길 8-13, 수서타워 910호 (수서동)
(06367)
Tel. 02-754-8004
Fax. 0303-0272-4967
Email. info@worldview.or.kr
기독교학문연구회
Tel. 02-3272-4967
Email. gihakyun@daum.net (학회),
faithscholar@naver.com (신앙과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