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바야흐로 ‘갈등과 혐오의 시대’라는 표현을 마주한다. 남녀갈등, 세대갈등, 노사갈등, 정치적 갈등 등 최근의 사회적 갈등은 모든 사람이 체감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치러진 조기 대선에서도 이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치적 갈등에서 출발해 사회갈등의 여러 양상을 보았고 후보 지지를 두고 뜻이 다른 것이 갈등의 출발이 되기도 했다. 또한 ‘한남’, ‘한녀’, ‘이대남’ 등 젊은 세대에서 서로를 규정하고 적대시하는 모습은 남녀갈등이 팽배한 상황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이제는 갈등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여러 갈등은 쉽사리 봉합되기 어려워 보인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혐오와 멸시가 서로를 향해 한 발 망설임 없이 으르렁대고 있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사회적인 이슈와 이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깊이 파고 들어가며 명확하게 인식하고 지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갈등 상황을 두고 보이는 첨예한 대립과 각자의 의견을 접하는 것에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상황에 달려들고 있는지 각자의 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였다.
이 상황에 대한 마음가짐을 배운 곳이 IVF(한국기독학생회)였다. IVF의 ‘캠퍼스와 세상 속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학교 안에서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확장하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방향과 가치는 기독교 세계관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배우며 닮아가는 삶은 단순히 내 마음이 평온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우리 일상의 문제와 갈등을 마주해야 했다. 그 이면에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인식하고 다뤄가는 과정도 있는데, 이는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시선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마주하는 과정이었다.
내가 IVF에서 배운 가장 귀한 가치는 사랑과 공동체이다. 그리고 ‘공동체’라는 가치는 단순히 나와 대화가 잘 되는 사람들, 나와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 같은 주제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로 표현되는 단어가 아니었다. 공동체는 서로 인정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함께하려고 애쓰며 사랑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구하는 과정을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우리 스스로는 사랑할 수 없고 그저 받은 사랑을 조금이나마 흘릴 수 있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고 그 사랑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흘리길 소망하며 모이는 공간과 시간이 공동체였다.
그렇게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배우며, 범위를 확장하는 시간을 보냈다. 광운대 IVF에서 만난 한 선후배부터 이 땅을 살아가는 누군가까지 확장하는 과정은, 사랑받은 자가 이웃을 사랑하는 과정이었다.
기독교 세계관은 사랑의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할 수 없는 우리가 가까운 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의 범위를 확장하는 싸움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때에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유를, 아직 모르는 이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삶을 바라보며 긍휼의 마음을 품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사랑받을 수 없는 우리가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인 나를 마주했으나 그럼에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마주할 때, 내가 사랑받았다는 사실은 내가 사랑할 이유가 되어 삶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기독교는 이웃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또 이웃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보게 된다. 사회적 갈등이 팽배한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적어도 현대의 갈등과 대립을 두고 “우리는 무관하다”라는 말을 손쉽게 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갈등상황 중 대부분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이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 이웃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현재 기독교는 전자와 후자의 마음가짐을 모두 보일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갈등의 회복은 사랑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겸손히 나아갈 때, 그리고 그 사랑을 기꺼이 흘려보내기로 결단할 때 회복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분명 배타적인 종교이다. 모든 것을 ‘다르다’라는 표현으로 무조건 용인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배타성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중심이 있다. 설혹 ‘틀렸다’라는 사실이 그/그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분별이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나 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별이 사라지는 것이 위험하니 분별에 집중하고 여기에 머무르겠다고 한다면, 기독교 세계관은 거기에서 만족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답해가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사랑에 도전하면 분별을 잃고 휩쓸릴까 너무나 두려운 마음이 존재하지만, 이 두려움 속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용기와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긍휼과 안타까움을 기꺼이 마주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품으신 같은 마음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에게 사랑의 발걸음을 우선적으로 구하는 기도가 끊어진다면, 분별이라는 가치를 방패 삼아 오히려 사랑하기를 포기한 마음을 숨겨둔 채 살아가는 원치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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