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페이스 링골드(Faith Rinngold, 1930-2024)는 9.11 사태로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을 때 ‘스토리 퀼트’란 작품으로 인류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여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그런 페이스 링골드의 저력은 1960년대 시민권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틴 루터킹이 주도한 비폭력 시민권 운동이 일부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폭력 양상을 띠자 낙관주의에서 비관주의로 바뀌어갔다. 이 무렵 제작된 것이 페이스 링골드의 야심작 <아메리칸 피플 - 죽음>(The American People-Die, 1967)이다.
페이스 링골드, 어메리칸 피플 연작,캔버스에 유채,182x365cm,1967.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시민권 운동의 정당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면의 사실에 주목하였다. 열 명의 성인과 세 명의 아이가 위험천만한 사건에 휘말려 그야말로 혼동 자체를 방불케 한다. 흑인과 백인을 가리지 않고 총과 칼을 겨누며 이미 총칼에 쓰러진 희생자들도 눈에 띈다. 중앙의 아이들은 벌벌 떨고 있지만, 극도의 혼란 속에 누구라도 감히 이들을 지켜주기 위해 나서지 못한다. 등장인물들은 가해자이거나 피해자 중 어느 하나가 되어 혈투를 벌이는 중이다. 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한 링골드였지만 폭력 행위마저 지지한 건 아니었다. 부상을 입은 여인이 아이를 안고 황급히 자리를 뜨는 장면은 증오가 어떤 참담함을 가져오는지 경고한다.
사회적 불의를 종식시키는데 힘을 모아야 하지만 관건은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는 점이다. 합리적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이미 우리는 각자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가령 국가 간 축구경기를 볼 때 ‘편견’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아슬아슬하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순간에 불거진다. 심판 판정이 유리하게 작용할 때는 ‘옳다’고 받아들이지만, 불리하게 작용할 때는 ‘틀렸다’고 간주한다. 물론 인간은 로봇이 아니기에 꼭 정답만을 내놓을 수는 없다. 구성원들은 특정 집단에 속해 있고 그 습속과 역사성을 따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장은 ‘사실 그 자체’ 이상의 훨씬 더 많은 요인들에 위해 형성된다. 그렇다고 객관적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며 주관적인 판단을 객관적인 진실에 맞추려는 우리의 노력을 단념해서도 안 될 것이지만. 집단과 집단이 충돌할 때 긴장의 수위가 고조될 수밖에 없다. 링골드가 <아메리칸 피플>에서 말하려고 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다.
벤 사스(Ben Sasse)는 <그들 :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며 어떻게 치유하나>(Them : Why We Hate each Other, and How to Heal)란 책에서 우리의 편견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미디어 환경’을 든다. TV, 유튜브, SNS(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미디어 속의 고립은 우리가 고수해오던 가치관과 목표, 그리고 삶의 방식을 가상적 커뮤니티로 대체했다는 것이 벤 사스의 주장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공동체와 미디어상의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은 특정 사안이 충돌할 때 두드러진다. 같은 매체를 이용하는, 사고방식마저 비슷한 사람들이 ‘그들’(them)을 비난하면서 동질감을 나눈다. 이념이 다른 사람들은 상대가 어떻게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상대를 ‘편 가르기’하고 ‘혐오’함으로써 외로운 영혼을 달랜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공동체 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해온 사람들에게 미디어로 인한 ‘고립’의 대가는 클 수밖에 없다. 그것은 뿌리를 잃은 데서 오는 것, 건강한 형태의 소속감이 사라지는 데서 오는 것, 함께 할 사람이 없다는 데서 오는 허전함 같은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것 같다.
페이스 링골드, 아를의 해바라기 퀼팅모임,캔버스에 유채 및 퀼트,1991
페이스 링골드는 만년에 <아를의 해바라기 퀼팅 모임>(1991)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흑인 여성 인권에 헌신한 여성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취지로 제작된 작품이다. 공적 양심을 갖고 희생적인 삶을 살아온 그들은 존중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림을 보면 해바라기가 상징하는 ‘희망’과 ‘생명’을 직조(퀼트)하는 ‘공동 작업’을 하고 있다. 인종차별에 저항하고 인권의 회복에 헌신했던 이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인류 공동의 프로젝트로 확산시키려고 한다. 작가는 “당신도 희망의 공동체를 직조하는 공동 작업에 참여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해바라기를 짜는 ‘퀼트 작업’은 넓은 세상으로의 초대요 평화로운 세상을 형성하는 은유로 해석된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반 고흐도 이들을 축하하고 운동에 동참하려는 참이다. 이미 작고한 반 고흐를 ‘퀼팅 모임’에 끌어들이다니 링골드의 재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문뜩 이전에 읽었던 책이 기억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예술작품의 특징으로 ‘일어날 법한 것’(what may happen)의 형상화를 손꼽는다. 즉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바를 열린 관점으로 바라봄으로써 작품을 참신하게 구성한다는 논리이다. 작품 속에서 “과거에 그랬듯이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라고 예감하는 것은 공감을 사지 못한다.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펼쳐 보일 때 감상자는 리트머스종이처럼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페이스 링골드의 그림에서 보듯이 열린 세계에 대한 상상력은 갈등과 긴장 속에서도 더 나은 세계, 곧 희망의 공동체를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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