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두어 시간마다 버스가 다니는 농촌에서 자란 나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도시는 꽤 역동적이고 재미있는 곳이었다. 금세 풍경이 바뀌는 시내의 거리가 질릴 리 만무했고, 체험학습 삼아 말로만 듣던 유명한 교회 이곳저곳에 발을 들여보기도 했다. 시골에 살면서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야 한다”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는데, 과연 도시는 두고 온 고향에 비해 놀거리도, 사람도, 기회도, 정보도 훨씬 많았다. 나는 종교학과에서 한국 개신교 자료들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던 중에, 문득 한국 교회에 대한 연구 역시 도시의 사례에 불균형하게 집중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이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었던 1960년대, 1970년대 이래 수도권의 종교 지형의 변화는 연구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특히, 한국 개신교회의 성장을 조명한 연구는 주로 인구가 집중된 수도권에서 대두한 대형 교회의 양적 성장에 초점을 둔 경우가 많았고, 대개 비판과 우려의 논조가 담기곤 했다.
한편, 농촌 교회는 연구자들의 시야에서 상대적으로 비켜나 있었고, 나는 도시화가 진행되는 동안 인구가 빠져나간 지역에 소재한 종교 공동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과연 농촌과 농촌 교회가 언급되는 자료들은 위기감 넘치는 목소리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농 현상과 고령화와 같은 상황은 교세와도 무관하지 않아서 교계에서는 농촌 지역의 위기를 교회의 위기로 인식하기도 했다. 농촌과 농촌 교회는 존립마저 염려해야 하는 상황 가운데서 과연 소망을 품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증폭되는 소멸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히려 지역 사회의 활성화에 앞장서고 종종 성장세를 보이며 좋은 목회 사례로 언급되는 교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만났던 사례 교회들은 그저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지역 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관계를 쌓아왔다. 어떤 교회는 교회 건물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주민들이 언제든 쉬어갈 수 있는 문화 공간을 마련했고, 또 다른 교회는 폐교 직전의 초등학교를 살리기 위해 십수 년간 차량 운행을 하고 방과후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판로를 만들기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에 앞장서는 교회가 있었고, 지역의 활성화와 주민들 간의 즐거운 교류를 위해 매년 축제를 준비하는 교회도 있었다. 분명한 점은 농어촌 교회가 벌이는 이러한 활동들이 결코 단순한 시혜적 활동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단기간의 프로젝트나 일회성 봉사도 아니었다. 활동의 종류나 규모를 나열하자면 도시의 대형 교회에 한참 못 미치지만, 이들 교회는 지역 사회에 확실히 뿌리내리고 녹아 들어가 있었다. 교회 건물이 작은 대신 문턱이 낮았고, 조금은 덜 세련되더라도 자연스러운 친밀감을 누릴 수 있는 소풍, 잔치, 모임이 곧잘 기획됐다. 이들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자 마을의 주민으로서 지역의 현안을 곧 교회의 관심사로 여겼다. 그들은 이웃과 함께 생활 환경을 공유하며 마을에 애정을 가지고 활기를 북돋우기 위해 노력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
흥미로웠던 점은 이처럼 지역 사회에 꾸준히 참여해 왔던 교회들에 종종 새로운 성도들이 유입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인터뷰이였던 한 목회자는 주민으로부터 “목사님이 어떤 마음인지 아니까 저도 교회 나갈게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내게 전해주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주민들이 교회에 친밀한 마음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본인은 예배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지역 교회를 가리켜 “우리 교회”라고 말하는 주민들이 있었고, 마을의 대소사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교회로 찾아오는 주민들도 있었다. 군이나 면 차원에서 교회와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은 세속화 논의를 촉발했던 학자들이 주목하고 예견한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의 약화’와는 다른 결의 현상이다. 또한, 국교의 지위에 있던 기독교의 통제로부터 사회의 여러 영역이 분화된 역사적 경험이 깔린 그들의 논의에서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의 성격이 ‘강제력’이나 위로부터의 ‘통제력’으로 상정되어 온 것과는 달리, 사례 교회들의 영향력은 개인적, 공적 수준에서 인정받으면서도 오랜 시간에 걸쳐 아래로부터 관계 기반적으로 쌓아온 것이었다.
많은 교회들을 포함하여 한국 사회가 성장과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수도권은 과밀해졌으며 이제 지방의 소멸을 운운할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역설적이게도 교회의 건강한 미래를 지방에서, 농촌의 작은 교회에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이 대도시로 향할 때, 빠른 문제 해결과 성장을 바랄 때, 반대의 정신을 가지고 구름호수 마을에, 신죽3리 마을에, 사천 마을에, 그리고 이밖에 아름다운 마을들에서 이웃과 함께 살기로 한 목회자와 성도들을 보면서 말이다.
나의 또 다른 인터뷰이였던 한 목회자는 시골 교회의 목회자가 자주 바뀌는 상황에서 자신이 트랙터를 몰고 마을에 들어오자 주민들이 “목사가 이제는 우리랑 같이 살려나 보다”라고 했다고 말해주었다. 이웃 사랑은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물리적인 이 땅, 이 지역에서 이웃과 눈을 맞추고 어울리며 함께 사는 것에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논밭에서 땀 흘리는 농부들에게 음료수를 나눠주며 “수고하십시오”라는 인사만 하기보다는 직접 땅 위에서 농부로 살아가는 목회자들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양복 차림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대신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로 마을의 대소사를 쫓아다니는 목회자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웃과 함께 울고, 웃고, 머리를 맞대고, 떡을 떼고, 소망을 품는 성도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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