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격변의 시대, 교회가 희망이다!!
- <울지마, 톤즈> (구수환 감독, 2010, 다큐멘터리)
- 지방소멸? 속도의 후유증!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속도”를 절감하게 한다. 이 시대를 ‘속도의 시대’(Age of Speed)라고 부른지 반세기가 지나는 지금 우리는 스스로도 체감하지 못하는 사이 속도 전쟁에 깊숙이 들어왔다. 속도는 어린아이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퍼져있다. 이미 세계 속에 대한민국의 별명 하나가 알려져 있었으니 “빨리, 빨리!”였다. 한국인이 가는 곳에는 으레 이 “빨리, 빨리”가 따라다녔다. 여행지에 가면 외국인 관광 가이드가 외친다. “빨리, 빨리!” 속도전에 익숙한 한국식 관습 때문에 경제적 발전도 급속하게 이뤄낸 것이 사실이다. 이는 세계가 놀랄 정도 아닌가.
그러나 여기에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속도의 습관이 무의식적 욕망이 되어 결국 현재와 같이 여러 후유증을 보게 한다. 어쩌면 한국인 자신이 속도전의 희생자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지방소멸이라는 주제와 연관해 보자면, 우리가 그토록 빨리 뭔가를 이루고자 했던 성취욕이 결국 여기까지 이르게 한 주원인이 되었다 하겠다. 학교에서 이미 습관화된 경쟁의 속도, 사회에 나와 성공을 위하여 치열하게, 처절하게 뛰지 않으면 안 되는 무한경쟁의 속도! 이런 속도가 급기야 역기능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사회의 균형이 서서히 깨져가는 여기저기서 파열음이 들리고 있다. 그중 하나가 지방소멸 현상이다. 이는 속도로 인하여 생긴 청년층 N포 현상, 저출산 문제, 고령화 사회 진입, 도시 집중 등이 만들어낸 종합세트이다.
- 본회퍼의 ‘세상 속 교회론’
본회퍼(D.Bonhoeffer, 1906~1945) 목사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성도의 교제>에 “교회 사회학에 대한 교의학적 연구”라는 부제를 붙인다.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문화신학 등등 연구할 주제도 넘치건만, 사회학적 관점이 왠 말인가!” 이렇게 반문하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역할, 예수님이 원하셨던 ‘바로 그 교회’를 다시 깊이 생각해야 한다. 교회와 사회학을 연결하자면 교회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사회 안에 존재하며, 그리스도의 인격, 사랑과 용서와 화해, 그리고 평화를 실현하는 인격적 공동체라는 의미이다. 본회퍼가 직관한 현대 교회의 결핍은 바로 이런 요소였다.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현존, 즉 지금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면 “어떻게 행하셨을까!”를 깊이 생각하고 신실한 신앙적 행위로 살아가는 “너와 나의 공동체”가 곧 교회라고 보았다. 교회는 이익집단이어서는 안되고,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에 빠져도 안 되고, 더구나 권력 집단이어서는 안된다.
- 이태석 신부의 <울지마 톤즈>
교회는 신비하다. 교회는 공동체로서 존재하면서 또 개인으로도 존재한다. 교회는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도 표현될 수 있기에 ‘그 한 명’은 참으로 귀중하다. <울지마 톤즈>는 소중하고 귀중한 한 명의 신앙인을 보여준다. 이태석 신부(1962~2010)가 주인공이다.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복음을 알게 되고, 의사의 삶을 주님을 위해 바치고자 신부가 된다. 그리고 멀리 남수단 톤즈로 부름을 받는다. 그곳에서 내전으로 인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현지인들을 위해 온전히 헌신한다. 병원이 없어 의료혜택은 전혀 받을 수 없고, 위생, 간호 개념도 알지 못하는 곳, 학교와 교육도 뒷전이었던 곳 톤즈, 하루하루 광야의 삶을 살아가는 그곳 톤즈. 한센씨 병으로 몸이 무너져내리는 환자촌에 들어가 그들을 품에 안고 치료하는 사랑. 그는 예수의 심장으로 자신의 삶을 모두 바친다. 그러는 가운데 문득 암이 발견되나 이미 깊어진 상태. 주님께서는 서둘러 그를 자신 곁으로 부르셨다.
- ‘지방소멸’ 앞의 교회?
‘지방소멸’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왠 <울지마 톤즈>인가? 이 이야기가 무슨 대안이 될 수 있겠냐는 반문이 나올 법하다. 이 문제를 풀어가는 대안으로 교회의 본질을 다시 생각한다면 희망이 보인다. 속도와 세상의 지혜로 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예수 사랑으로 성숙한 인격적 공동체로서 교회가 “땅끝”까지 가야 한다면, 소멸되어가는 지역도 땅끝이 되리라. 그 땅끝으로 가는 교회, 그 교회에 헌신한 ‘한 사람’ 성도, 그 성도들이 모여 함께 한다면 격변의 시대에 적합한 방안들이 찾아질 것이다.
이태석 신부의 삶은 자신의 사랑과 헌신에서 끝나지 않고, 마치 버려진 땅과 같은 광야를 새롭게 하였다.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사 35:7). 한 사람의 헌신이 톤즈를 회생시키고 희망을 밝힌 사연은 예언에 약속된 작은 부분이지만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 격변 시대에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한다면 환경을 초월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 톤즈의 현지인들처럼 위기 속에서도 예수의 발자취를 좇는 이들과 함께 할 때 길이 열리리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우물 안 개구리처럼 교회끼리, 교인들끼리, 끼리끼리 <당신들의 천국>에서 살지 말고, 벽을 허물고 담을 넘어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을 포옹하며 울부짖는 마음으로 복음을 살아내야 한다. 치열하고도 철저하게, 장엄하고도 고귀하게 예수 생명을 살아내야 한다. 교회 개혁은 구호에 있지 않다. 교회 개혁은 진정한 회개와 순종의 행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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