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셔서 하와를 지으셨고, 인류는 이런저런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 왔다. 다른 사람이 있어야 번식이 가능하고 언어가 필요하며 언어가 있어야 생각할 수 있으므로,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면서 존속하려면 같이 살아야 한다.
그보다 더 공동체가 필요한 것은 짐승과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다. 거기다가 범죄한 인간은 미래의 ‘가능한 상황’에 대한 상상력과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 능력 때문에 당장 필요한 것보다 더 큰 힘을 비축하려 하고, 그것은 다른 집단과의 경쟁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하나님 면전에서 쫓겨난 가인은 적대적 집단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았다”(창 4:17).
공동체의 단합은 처음에는 가족, 씨족, 종족, 민족 등 혈연에 근거했다. 그러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지역, 언어, 종교, 생업 등 다른 요소들이 같이 혹은 주로 작용하면서 변천해 왔지만, 지금은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서 이해를 공유하고 같은 법, 같은 통치제도로 뭉쳐진 국가가 가장 중요한 단합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언어, 문화, 전통, 인종, 종교 등은 점점 더 부차적이고 국수주의적이 되고 있다. 국가(國歌), 국기, 역사뿐 아니라 심지어 올림픽 등 운동경기를 이용하여 단합을 장려하고, 애국을 미덕으로 교육하고 있다.
이렇게 국가가 기본적인 공동체로 공고화되는 데 크게 작용하는 것은, 자연과학과 그에 근거한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사람들의 세계관이 점점 더 물질주의적이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억제되고 승화되었던 인간의 동물적인 욕망을 이제는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든 국가는 이익공동체로 고착되고 다른 요소들은 모두 그에 보조적이 되고 있다.
이런 국수주의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도 별로 비판적이지 않다.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반기독교적인 일본의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건국에 이바지한 것을 미덕으로 생각할 정도로 애국적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최근 미국의 상황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국 그리스도인들도 자국 우선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너무 많은 외세 침략을 받아 왔고 너무 약하고 가난한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는 있다.
그런데 예수님과 사도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속한 국가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했다. 이스라엘은 기나긴 역사를 가진 문명국이었고, 한때는 그 지역의 최강국으로 여러 나라를 지배했으며, 하나님의 선민이란 자존심과 성경이란 위대한 유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나라가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어 온갖 차별과 무시와 억울함을 당했으니, 그런 억울함을 표현하고 항거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당대 유대인들 가운데도 로마 지배에 대해 강렬하게 저항한 움직임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특이하게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애국이나 자국 중심적 요소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국가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은 초대교회 교부들에도 비슷했다. 주전 1세기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의로운 전쟁’ 이론을 제시하면서 조국이 침략을 받을 때는 무조건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의 전쟁 이론에는 그런 국수주의적인 요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이었지만 당시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기독교적 로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상했던 ‘영원한 로마’ 이념을 모두 배격하고 ‘하나님의 도성’과 ‘땅위의 도성’을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그만큼 기독교는 처음부터 국가 우상화를 반대해 왔다.
그러나 종교개혁에 이어 상당 기간 지속되던 천주교와 개신교 간의 전쟁이 1555년의 아우구스부르크 평화조약으로 끝났을 때 양측이 합의한 원칙이 ‘누구의 영토, 그의 종교’(Cuius regio, eius religio)란 것이었다. 한 지역 주민의 종교는 그 지역을 통치하는 군주의 종교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신앙이 군주의 신앙과 다르면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진 군주의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도 허용되었다. 서양 역사에서 국가의 주권이 종교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그 후 서양 교회는 점점 국가에 예속되어 자국의 비도덕적인 식민지배를 비판하고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선교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협조하는 쪽을 택했다. 결국 영적 권위를 완전히 상실한 기독교는 오늘의 쇠퇴를 자초하고 말았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상당수는 낙태, 동성애 등을 자국 우선주의보다 훨씬 더 큰 악으로 취급하고 한국에서도 비슷한 혼란이 엿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달랐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열심히 드리면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정의, 자비, 신의는 버렸다고 질책하셨다(마 23:23). 자국 이익 추구와 애국을 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강대국들이 약한 나라들을 착취하고 그 주민들을 심각한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뜻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환경오염까지 가중시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비성경적이고 어리석은 자해행위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과 기본적인 양식을 소유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반대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국가에 우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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