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근대 사회는 오랫동안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이해해 왔다. 하버마스는 모든 사람이 충분히 대화하고 합리적으로 토론한다면, 결국 옳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현실은 어떨까? 이성적 토론보다는 감정적 반응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듯 보인다. 정치와 종교, 심지어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분노, 불안, 혐오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우리가 감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탈진실’(post-truth)은 ‘사실보다 감정이 더 큰 힘을 갖는 사회 현상’을 말한다. 사람들은 불편한 진실보다 자신의 믿음이나 진리 체계를 지켜주는 거짓을 선택한다. 이를 가리켜 ‘인지 편향’(cognitive bias)이라고 한다. 이런 경향은 집단 안에서 더 강화된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정체성의 감정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감정은 단순한 개인의 느낌이 아니라, 집단의 결속을 유지하고 타인을 배제하는 정치적 에너지로 작동한다. 즉, 가짜뉴스를 믿거나 소비하는 원인은 단순히 무지해서가 아니라 내가 속한 집단의 감정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 선택에 가깝다.
모든 감정이 나를 형성하거나 인지 편향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은 이성적 판단에 꼭 필요하다.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와 리사 펠드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은 감정이 이성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판단한다고 느낄 때조차, 그 밑바닥에는 이미 감정이 작동하고 있다. 즉, 감정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판단의 전제이며, 몸과 마음, 그리고 환경이 연결된 하나의 통합된 과정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정동’(affect)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나 마수미(B. Masumi)와 같은 학자들은 정동을 가리켜 감정이 발생하고 움직이는 힘으로 보았다. 즉, 인간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힘, 에너지, 또는 역학 관계가 바로 감정을 통해 발생하는 현상으로 이해한다.
정동은 개개인의 차이나 특성에도 불구하고 한 집단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문화적 서사 또는 정체성을 설명할 때 특히 유용하다. 왜냐하면 정동은 개인 안에만 머물지 않고, 집단적 정서로 확장되며 사회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2년 한일월드컵이나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건을 떠올려 보라. 그것은 한국인에게는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정동적인 경험’으로 각인되어 ‘한국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광장의 한국교회를 생각해 보자. 이들은 왜 가짜뉴스를 만들거나 소비하고, 나아가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는 것일까? 이런 판단과 행동에는 바로 감정(정동)이 내재한다. 특히 한국 역사를 거쳐 형성된 집단 트라우마처럼 말이다. 일제 식민주의부터 전쟁과 분단, 독재의 기억은 공포와 적대의 감정(정동)이 각인되어, 한국 개신교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왔다. 이 감정은 세대를 넘어 전이되고, 정치적 판단과 종교적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신앙’의 이름을 내걸지만, 실은 두려움과 분노, 혐오의 감정이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작정 비판하기보다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즉, 감정의 전환과 정동의 치유가 신학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혐오와 배제의 대안적 기억으로서 기독교의 성육신에 주목한다. 아타나시우스는 기독교의 핵심인 하나님의 사랑을 성육신의 신비로 요약될 수 있다고 보았다. 곧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히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몸을 입고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감정, 즉 몸의 언어로 표현된 실제적 사랑을 의미한다. 성육신의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함께 아파하는 사랑이다.
혐오는 두려움의 일부이지만 공포와는 구별된다. 공포는 자신보다 강한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이라면 혐오는 자신보다 약한 대상에 대한 우월적이고 지배적인 동시에 폭력적 반응으로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자국 우선주의는 주로 자신보다 약한 국가, 인종,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고 비난하는 형태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적 가치와 매우 상반된 것이다. 성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귀한 존재임을 천명한다. 그럼에도 다수의 국가에서 혐오와 배제의 정책에 동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두려움(혐오) 때문이다. 하지만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일 4:18).
우선, 한국교회는 이 성육신의 사랑을 어느 때보다 강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말과 머리로만 아는 진리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사랑의 언어가 필요하다. 성만찬과 예전적 실천의 가능성에 주목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자체가 곧 가장 핵심적인 매개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의 거룩함과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교회 갱신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광장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공공신학적 논의가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우리는 혐오와 두려움에 맞설 수 있으며, 사랑으로 넉넉히 품으며 이 위기를 극복할 힘과 지혜가 있다. 이것이 오늘날 글로벌 자국 우선주의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기도요 실천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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