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자국 우선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일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국제 협력과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질서가 도전받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교회 역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자국 우선주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복음의 메시지가 국가나 민족, 혹은 특정 정치 이념으로 축소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종종 진자운동처럼 양극단을 오간다. 20세기 말, 냉전의 종언과 함께 세계화와 자유무역을 축으로 재편되기 시작한 국제 질서는 이제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의 방향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다. 이러한 진자운동은 한국 개신교의 정치참여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과거 한국 개신교는 정교분리의 원리 아래 원칙적으로는 비정치화를 지향했으나, 점차 이에 대한 반발로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정치적 책무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그 정반대의 문제, 곧 과잉 정치화로 인해 특정 정치세력과 지나치게 밀착되면서 복음의 초월성과 보편성을 상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 역사를 관통하는 두 가지 원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선교 역사가이자 세계기독교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앤드류 월스(Andrew Walls)는 기독교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원리이자 복음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토착화 원리’(Indigenizing Principle)와 ‘순례자 원리’(Pilgrim Principle)를 제시한다. 토착화 원리는 복음이 각 사회와 문화 속에 구체적으로 뿌리내리는 특성을 말한다. 토착화 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고후 5:17) 사회·문화적 진공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속한 사회와 문화 속에서 새로운 존재 양식과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으로 어떤 문화와 사회도 배제하지 않으면서 다채롭게 각 문화와 사회에 뿌리를 내리며 그것을 변혁시켜왔다. 결국, 토착화 원리란 우리가 속한 문화의 아주 구체적인 영역에까지 침투하고 뿌리를 내리는 복음이 지닌 특성 혹은 능력을 말하며, 사회·정치 영역 속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노력도 이 원리 안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순례자 원리는 이 세상에 속했으나 또한 속하지 않은 정체성을 그리스도인에게 부여한다.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터전이 영구한 터전이 아님을 기억하며(히 13:14), 하늘에 시민권을 둔 순례자로 살아간다(빌 3:20).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와 사회를 결코 궁극적 형태로 인식하지 않으며, 오히려 장차 임할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며,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으로 우리의 현실을 비판하고 또한 변혁시킨다. 이러한 순례자 정체성은 시대, 장소,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을 연결하며, 그리스도의 교회에 우주적인 공통성을 부여한다. 이것이 교회 역사 속에 '교회의 보편성' 혹은 '공교회성'이라고 불리며 전수되어온 인식이다. 비록 다른 국가와 다른 문화권에 속해 있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심지어 다른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본향을 둔 순례자들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된 하나의 공동체라는 공유된 정체성을 소유한다. 결국, 순례자 원리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의 가족으로 연결하는 복음이 지닌 특성 혹은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는 그 유구한 역사 속에서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이 두 가지 원리를 함께 견지하고자 노력해왔으며, 체스터턴(G. K. Chesterton)이 <정통 Orthodoxy>에서 지적하듯, 언제나 비극은 서로 대립되어 보이는 기독교의 특성들 중 하나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발생했다. 토착화 원리만이 강조될 때 복음은 특정 문화나 민족주의의 포로가 되고, 순례자 원리만이 강조될 때 기독교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 신앙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자국 우선주의와 과잉 정치화에 함몰된 교회의 모습은 어쩌면 이 두 원리 가운데 하나의 원리, 곧 순례자 원리에 대한 강조가 우리 가운데서 약화되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순례자 원리는 우리가 속한 국가와 문화가 궁극적인 형태가 아니며, 따라서 이를 복음의 빛 안에서 끊임없이 비판하여 변혁해야 할 대상임을 깨닫게 하고, 또한 모든 문화·시대·인종·사회경제적 배경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이들과의 연대를 추구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자국의 이익에 매몰되지 않고, 민족주의·국가주의로 복음을 축소하지 않으며, 국경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날 순례자 원리가 자국 우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이러한 점에서 2세기 경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 Epistle to Diognetus>에 묘사된 초기 기독교인들의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울림과 숙제를 남긴다.
“그리스도인과 다른 사람들과 차이는 국적, 언어, 관습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만의 도시를 만들어 떨어져 살거나, 자신들만의 언어를 사용하거나, 별난 생활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놀랍고도 실로 인상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살아가되, 단지 나그네로서 살아갑니다. 시민으로서 그들은 다른 이들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지만, 마치 외국인인 것처럼 모든 것을 감내합니다. 그들에게는 어느 외국도 모국이요, 어느 모국도 외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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