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트럼피즘의 폭풍이 세계를 휩쓸고 있다. 연일 쏟아지는 미국발 뉴스에 귀를 기울이며 정부는 산업과 국방 대응전략을 수시로 짜내고 개인은 물가와 경기를 우려하며 초조하다. 강자의 정치에 휘둘리는 우리의 모습에 자괴감을 토로하는 한편, 이제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각자도생의 원리를 설파한다. 트럼프를 세속화의 물결을 가로막을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하는 이들과 그를 추잡하고 무도한 정치인으로 비판하는 이들 사이에서 반목과 불신의 장벽은 날로 높아만 간다. 그야말로 양극화의 파도가 미국을 넘어서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그렇다면 트럼피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미국 공화당 지지자들, 특히 복음주의 교회들은 왜 트럼프와 그의 자국 우선주의를 지지하는가? 다수의 전문가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미국 백인 중산층의 두려움이다. 자신들의 오랜 삶의 가치와 방식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깊은 우려가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는 거센 목소리를 낳고 있다. 실제로 오랫동안 다수이자 강자였던 그들의 지위가 위태하다. 미국 인구 중 백인(히스패닉 제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 79.6%에 달했으나 이후 꾸준히 감소하여 2024년 56.3%에 이르렀다. 2024년 기준 18세 이하에서 백인은 47.5%를 차지하며 가장 낮은 인구성장률을 보인다. 개신교 백인이 다수를 점하는 미국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 변화를 약 20년 전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우리는 누구인가?>(Who Are We? The Challenges to American’s National Identity)에서 지적하였다. 미국 백인의 입장에서 스스로에게 경고한 셈이었다. 우리의 종교(개신교)와 언어(영어)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때가 곧 온다고 말이다. 1990년대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에 등극했지만 다양한 사회 문제를 둘러싼 반목을 피할 수 없었다. 미국정치 체제와 문화는 낙태, 동성애, 총기, 인종 등을 둘러싼 합의가 아니라 전선을 지속적으로 양산하면서 경제와 사회 안정성을 약화시켰고 급기야 2008년 금융위기를 낳고 말았다.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미국 엘리트의 불의와 무능이 빚어낸 비극이었음에도 미국의 변화는 시위와 선거에서 난무한 구호에 그쳤고 사회 불만은 고조되었다.
누가 우리를 도울 것인가? 이러한 백인 중산층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대답한 정치인이 바로 트럼프였다. 그리고 그들의 불만과 불안을 이용했다. 모든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그러듯이 말이다. 다만 트럼프는 한층 선명했고 대담했다. 명료하고 통쾌하게 미국 정치와 경제 엘리트를 비난했다. 그들을 사악한 심층국가(Deep State)로 규정하고 이와 맞서 싸울 용사로 자신을 소개했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 덕분에 트럼프의 선전과 비난을 그의 지지자들은 끊임없이 소비하면서 자신들의 믿음을 강화시켰다. 물론 반(反)트럼프 연대가 발 빠르게 구축된 것도 사실이었으나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은 모든 이들의 지지를 추구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지도자로 만들어준 그들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가장 중요한 숙제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트럼프는 신실했고 2025년 백악관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러한 트럼프는 지지자들에게 마치 구원자와 같았다.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 religion and politics)의 관점에서 미국의 트럼프를 러시아의 푸틴, 헝가리의 오르반, 터키의 에르도안,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등과 흔히 비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적 관점에서 선과 악을 나누고 자신을 선의 수호자이자 국가의 구원자로 포장하는 지도자들이 최근 들어 급부상한다. 그들은 경제 불안과 종교 약화를 두려워하는 대중에게 전통 가치와 강력한 리더십을 약속하면서 자신들의 시대를 열고 있다. 이러한 ‘스트롱맨’ 무리의 우두머리는 단연 트럼프이다. 개인과 소수의 인권을 강조하며 견제와 균형에 기초한 정치를 세계로 수출한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미국 백인 중산층의 구원자를 갈구하는 열망은 뜨거웠고 그 결과 트럼프는 뉴미디어와 양당체제를 활용해 두 차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트럼프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심판자의 자리를 선사한다. 실제로 판결을 내리고 처벌을 집행하지 않지만, 그러한 효능감을 제공한다. 누구에 대하여? 바로 민주당, 소수자, 이민자 등이 목표물이다. 트럼프의 거친 언사는 민망할 정도이지만 그것을 소비하며 만족을 느끼는 대중이 많다. 이러한 트럼프의 전략은 자신과 미국 기독교 사이의 연대를 낳았다. 하나님의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는 미국 교회의 자각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의 신앙과 양심에 부합하지 않는 교육과 복지 제도가 일상을 더럽히는 상황에서 그들의 반대와 저항은 거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지키려는 ‘나라, 권력, 영광’이 진정 하나님의 그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그것인지를 찬찬히 캐묻는 앨버타(Tim Alberta)의 고언은 소중하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거부하며 하나님만 경배하며 섬기기를 선택했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지를 물어야 할 때이다.
우리의 구원자는 누구인가? 어느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에게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삼상 8:5).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기대하여 따랐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 의분을 해소할 헛된 구원자를 찾는 노력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있다. 한편, 타인을 판단하여 제압하고 통제하여 심판자가 되려는 옛사람은 우리를 지금도 곤고하게 한다. 뱀은 선악과를 권하며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창 3:6) 것이라 말하였다. 누가 선악의 기준을 세우며 심판할 수 있는가?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은 구원자로의 추대를 거부하였으며(요 3:30, 행 14:15), 요셉과 다윗은 각각 형들과 사울을 심판하지 않았다(창 50:19, 삼상 24:6). 트럼피즘이 촉발한 자국우선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구원자와 심판자를 기억하며 사랑으로 두려움을 내쫓는 삶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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