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대학교 입학이 인생의 목표였던 나는 막상 대학생이 되고 나니 극심한 공허함에 시달렸다. 입학 후 노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기숙사 침대에 누워 고통스러웠던 대학 입시를 생각하며 앞으로 취업, 결혼, 자녀 양육 등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앞이 깜깜해졌고, 그것 모두 고통과 허무의 반복일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다고 들었는데, 하나님은 이런 고통과 허무가 반복인 삶을 살라고 사람을 만드신 것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어른 예배만 드리던 나는 이 물음을 아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청년부에 나가기 시작했다.
청년부에서 또래들과 성경 공부를 시작했고 내가 가진 근본적인 질문들을 했다. 또, 캄보디아와 몽골로 단기 선교를 갔다. 한국에선 입도 뻥끗 안 했지만, 선교하러 갔으니 전했던 복음을 통해 선교지의 사람뿐만 아니라 내게도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 전해졌다. 복음을 전하며 느낀 순수한 기쁨은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인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나를 엄청나게 사랑하신다”라는 확신을 주었다. 이 사랑 하나로 삶의 모든 어려움에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던 것 같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 봉사활동, 인턴 선교사 등 여러 진로를 두고 고민하며 지원했다. 세 곳 모두 서류에 합격했는데, 인턴 선교사 면접이 가장 먼저 잡혔고, 합격하여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이었다. 외국어고등학교를 다닐 때 중국어를 배우다 9등급을 받고 포기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어떠함과 관계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교회를 다니지 않으시는 부모님의 걱정 속에서 졸업식도 가지 않은 채 중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미국인 선교사님들과 한 팀이 되어 멘토링을 받고, 캠퍼스를 돌며 친구들을 사귀고 복음을 전했다. 언어도 익숙하지 않고, 친한 사람도 없는 곳에서, 또 하러 간 일이 선교다 보니, 내 마음을 터놓고 도움을 구할 곳이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기에 말씀을 읽지 않을 수 없었고, 기도를 멈출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그때 처음으로 성경을 완독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삶을 경험했다. 돈도 없고 좋아하는 옷 한 벌 사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임을 깨닫고, “하나님, 저 선교사 체질인 것 같아요. 저를 제일 힘든 사역지로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중국에서 선교사가 될까, 미국으로 신학대학원을 갈까 고민했으나 큐티 중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마음이 들어 1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선교지에선 하나님만 바라보며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고, 직업적인 준비를 하지 않았던 나는 무얼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후 나는 내 삶에 계획하지 않았던 여러 일을 맡게 되었다. 어린이집을 운영하시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모를 전도하겠다는 마음으로, 이모가 교회에 출석하는 조건으로 보육교사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고, 일하면서 “복음이 일터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이후 복지가 좋은 게임 회사에서 데이터를 정제하는 일을 하며 편안함을 누렸지만, 하나님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진짜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하셨다. 게임 회사의 계약이 끝난 후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길이 내 길이 아님을 깨닫고 시험 준비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눈치가 보여 빨리 취직해야 한다는 마음에 닥치는 대로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모두 탈락하며 망연자실한 심정이었다. 그때 나는 선교를 다녀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선교지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이 내 인생에 별 관심이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처럼 졸업 후에 선교를 가지 않고 바로 취업 준비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밀려왔다.
그렇게 갈 곳이 없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사회복지사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끌려가듯 어머니께서 운영하시는 요양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이 일을 오래 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전의 ‘중간 단계’라 여겼다. 요양원에서의 2년 반은 인간의 연약함, 외로움, 죽음, 고통과 가장 가까이 마주했던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인간은 어차피 다 아프고 죽는구나”라는 생각에 압도되어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르신들 그 자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르신들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분들을 향한 순수한 애정이 커졌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멀리 떠나지 않아도, 내가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신을 예배하고 섬기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요양원은 일하는 사람이 대부분 중고령층의 여성인데,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을 보며, 지금 20대 후반, 3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만 할 수 있는 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어르신들이 더 잘 살도록 돕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깊이 고민하고 기도하게 되었다. 대학원에 입학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준비를 시작했으나 일을 하면서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나님, 여기 붙여주시면 하나님이 하라는 일을 할게요”라고 기도했고, 내 생각엔 아쉬웠던 시험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 길에 들어섰지만, 매일 쏟아지는 과제와 논문, 바쁘고 치열한 일상 속에서 때로는 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때가 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부족한 내 모습을 보고 “나는 왜 여기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졸업 후엔 뭘 해야 하지?”하는 불안감에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내 계획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너를 이곳에 둔 것은 정확하고 완벽한 나의 뜻이다.”라고 잊을 만하면 여러 통로를 통해 말씀하신다.
나를 제일 잘 아셔서 그런지, 하나님은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면 안 되게 나를 인도하시는 것 같다. 재밌으신 하나님. 오늘도 한 치 앞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계시니, 내 인생은 앞으로도 재밌을 것 같고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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