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트럼프 시대의 ‘가버나움’은 어디인가?
미국을 바라보는 한국 그리스도인의 시선
지난 9월 4일 조지아주 엘러벨의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합작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근로자 317명이 체포·구금되었다. 비록 7일 만에 한 명을 제외한 근로자 전원이 풀려나 특별전세기 편으로 귀국하긴 했지만, 한국인들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투자하고 미국이 할 수 없는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공장을 짓는 전문기술자들을 불법체류자로 몰아 체포하는 일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한 역대급 단속이었고, 쇠사슬에 묶여 버스를 타는 한국인의 체포 장면을 보는 한국인들은 과연 트럼프의 미국이 지금까지 우리가 동맹으로 생각했던 그 미국이 맞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미국이란 나라는 세계를 움직이는 초강대국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절 혼란과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에게 복음뿐만 아니라 근대문명을 전하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만든 사람들은 바로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6.25를 겪으면서 한국은 미국 정부와 교회의 지원 속에서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 근대화의 시작과 기독교의 전래 시기가 비슷했고, 한국 사회의 발전 역시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한강의 기적과 교회의 성장을 얘기할 때 미국을 빼놓고서는 얘기할 수 없는 역사가 우리에게는 있다.
이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미국은 선교사를 보내주고 조국을 지켜준 고마운 나라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 강하고 부요하며 하나님의 큰 복을 입고 사는 나라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심어주었다.
그런데 보수적인 기독교 이념을 내세운 트럼프 2.0시대의 미국은 불안하기만 하다.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바람에 현대사에서 세계평화와 번영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 온 기적과 같은 행적이 과거의 일로만 여겨지게 될 것 같은 불안이 밀려들어 오기 때문이다. 나딘 라바키 감독의 영화 <가버나움>(2019, Capernaum)은 사랑과 우정 그리고 신뢰의 가치를 잃고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은 영화다.
무책임한 부모를 고소한 12살 아들
레바논 빈민가에서 생활하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자신의 출생일도 모른 채 일곱 식구와 살고 있다.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있지만, 여동생 사하르(세드라 이잠)와 함께 길거리에서 주스도 팔고 상점에서 배달 일을 도우며 집안 생계를 돕고 있다. 자인의 부모는 어린 아들이 약국을 돌며 사온 약품에서 항정신성 약물을 물에 녹이고는 옷가지에 묻혀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몰래 넘기는 일을 할 뿐 정상적인 가족 생계는 자인이 모두 떠맡고 있다. 자인은 부모가 여동생을 상인에게 돈을 받고 시집보낸 것에 대해 분노하고 집에서 나와 거리를 떠돌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이 집안이 단순히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자식을 돌보는 일에는 무책임한 부모에 관한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자식을 낳을 줄만 알았지 키울 줄 모르는 무책임한 부모와 어떤 돌봄도 없이 거리에서 자란 어린이의 삶 속에서 우리는 되풀이 되는 죄와 어리석음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이다. 관객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자인은 부모를 법정에 고소한다. 왜 부모를 고소하는지 묻는 판사를 향해 자인은 지금까지 어떤 영화에서도 들어본 일이 없는 말을 남긴다.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이 끔찍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건 그들이니까요.”
이 영화의 제목이 ‘가버나움’인 이유가 납득되는 순간이다.
예수님께 책망받은 도시 가버나움
영화 <가버나움>은 기독교 영화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성경의 내용이나 가치관을 명확히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성경이 비판하는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 필요가 있다.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주요 사역지였던 갈릴리 인근의 ‘가버나움’이란 도시에 대한 예수님의 언행을 알고 보았을 때 비로소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의도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등 다섯 제자를 부르셨고(마 4:13, 18-22, 9:9), 백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 그리고 네 사람이 메고 온 반신불수 병자 등에게 여러 이적을 행하셨다(마 8:5, 14, 9:1, 요 6:55-59). 마태복음은 ‘본 동네’(his own town, 마 9:1)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가버나움이 그 누구의 장소도 아닌 ‘예수님의 동네’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가장 많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목격된 도시인만큼 ‘예수님의 동네’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뜻밖에도 가버나움은 예수님으로부터 큰 질책을 받은 도시였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 11:24).
영화 <가버나움>은 가장 기적을 많이 목격한 도시가 책망의 대상으로 변한 상황을 현대적인 은유로 묘사하고 있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 레바논의 현실이 성경의 ‘가버나움’과 다를 바 없음을 그렇게 묘사했다. 그런데 영화를 본 우리에게 남은 생각거리는 한 가지뿐이다. 지금 가버나움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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