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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의 <칼뱅주의 강연>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세속 시대를 위한 칼뱅주의> / 제시카 & 로버트 자우스르트 편집 / 신국원 번역 / 다함 / 2025.
130년도 더 된 카이퍼의 <칼뱅주의 강연>을, 카이퍼의 나라 네덜란드 사람도 아니고 이 강연의 청중이었던 미국인도 아닌 한국인이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브랫(James Bratt)은 이 책의 서문을 쓰면서 비슷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칼뱅주의 강연>은 여전히 온 세계를 대항함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다 함께 취해야 할 하나의 모델을 제공해 준다.” 시대와 상황이 달라도, 또 카이퍼에게 여러 오류와 실수가 있어도 그는 여전히 이 시대 기독인들의 멘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에 동의하는 6명의 저자는 카이퍼의 <강연>의 6개의 강의에 대해 동일한 방식으로 해설하였다. 첫째, 카이퍼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둘째, 카이퍼주의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셋째,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에 더해, 인종에 관한 카이퍼의 발언을 비판적으로 다룬 글과, 카이퍼의 화란어로 작성된 강연 원고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발생한 문제를 다룬 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국원이 쓴 ‘칼뱅주의가 한국사회와 문화에 미친 영향’까지 해서 이 책은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들은 동일한 구조로 글을 쓰면서도 카이퍼의 강연 내용을 제시하는 방식이나 또 카이퍼와 본인 사이에 두는 거리는 저마다 달리했다. 저자들은 자신들이 카이퍼주의자라고 기꺼이 인정하겠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카이퍼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베이코트(Vincent Bacote)는 ‘카이퍼와 인종’을 쓰면서 카이퍼가 인종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난이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카이퍼의 위대성에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죄와 타락의 영향을 그에게서도 감지하는 것이다.
이 짧은 서평에 6개의 주제를 다 소개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 채플린이 쓴 ‘카이퍼와 정치’의 내용을 제시함으로써 카이퍼가 칼뱅주의 근본 원리를 각 영역에서 어떻게 확장시켜 나갔는지, 그 내용을 북미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여 발전, 적용했는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가 무엇인지를 맛보기로 하자.
카이퍼의 셋째 강연 ‘칼뱅주의와 정치’ 논의를 채플린은 영역주권이라는 개념부터 풀어나간다. 영역주권이란, 사회의 국가, 학교, 기업 등의 다양한 사회 기구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의 본질과 목적을 가지며, 따라서 정부를 비롯한 다른 기관으로부터 자유롭고 자기의 자치권을 행사한다는 사상이다. 영역주권 사상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서 출발한다. 국가가 학교에게 권한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든 학교든 하나님께로부터 권한과 사명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국가가 학교를 지배할 수 없고 학교는 독자적인 권리를 향유하며 학교의 고유한 규례를 따라 움직여 나가야 한다.
죄가 없었다면 칼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죄로 말미암은 불순종과 폭력을 막기 위해 하나님은 국가 제도를 세우고 칼을 기반으로 한 기계적 통치를 허용하셨다. 카이퍼는 국민의 주권에 기반한 계약설을 비판하는 한편, 한 나라의 국가는 그 나라의 역사적 전통에서 성립하여 그 나라 고유의 정체성과 의지를 구현하는 신비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국가주권설도 거부한다.
카이퍼의 이런 지침을 북미의 카이퍼주의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용했는가? 채플린은 이 원칙을 따를 때 종교다원주의 사회가 귀결된다고 본다. 만일 국가가 권력으로 사회의 다양한 기관들을 다스릴 권한이 없고, 그래서 각 사회 기관들이 자치권을 갖는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카이퍼는 국가 자체에도 그 배경에는 일정한 종교가 숨겨 있는 것처럼 다른 사회 기관들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사람의 사상과 행동은 그 사람의 세계관, 그가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따라서 그가 품은 세계관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기관이 어떤 목표로 어떤 원칙을 따라 운영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달라지게 된다. 이때 국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결정할 권한이 없다. 교회도 그렇게 할 권한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카이퍼가 선택한 해결책은 기둥화(pillarization)였다. 그것은 동일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그 세계관에 입각한 기관을 세우고, 이 세계관에 따라 운영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카이퍼는 이 원칙을 따라 자유대학교를 세우고, 기독교 정당, 기독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북미의 카이퍼의 후예들도 이 원칙을 따라 기독교 학교 연합과 대학 연합, 캐나다 기독교 노동협회, ‘공공정의를 위한 시민들’(Cititzens for Public Justice), ‘공공정의 센터’(Center for Public Justice) 등을 만들었다. 채플린은 이 원칙은 특정 문화적 민족적 특성에도 긍정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렇지만 이 원칙을 젠더 정체성이나 인종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는 논쟁거리가 된다고 진단한다.
마지막 장에서 신국원은 우리나라에서 칼뱅주의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끼쳤는지를 분석하였다. 그 실례를 기독교 세계관 운동, 기독교 교육과 학교 운동, 기독교 시민운동에서 찾을 수 있지만 한국의 칼뱅주의 교회조차 신앙을 삶과 통합하는 실천을 하지 못했음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칼빈주의 강연>부터 읽어야 할 것이다. 박영남, 서문강, 김기찬, 그리고 박태현의 네덜란드판 번역본이 있는데, 네덜란드어 원고를 영어로 번역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듯이 한글 번역에도 어려움이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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