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사회에 변화를 가져온다. 이를 접하고 이해하고 사용하는 능력을 갖추는 속도가 빠른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들도 있지만, 필자를 비롯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Chat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러한 확산 경향에 예외가 되었다. 예컨대, ChatGPT는 2022년 11월 22일 출시된 지 약 2개월 만에 1억 명의 활성 사용자를 확보했다고 알려진다. 이후에 출시된 다양한 생성형 인공지능 서비스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는 우리가 익히 경험하였다. 그러나 해당 분야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대다수 사용자의 입장에서 생성형 인공지능의 원리라든지 사용 방법을 간단명료하게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기독교 신앙이 영원을 지향하는 면이 있다고 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인공지능 현상과 담론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지 숙고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짧게나마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인공지능 리터러시’(literacy ≒ 읽기 능력)를 논의해 본다.
첫째, 인공지능이 인간론적이고 신학적인 함의를 지닌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현대 컴퓨터 및 인공지능의 토대를 놓았던 앨런 튜링(Alan Turing)은 ‘이미테이션 게임’(imitation game)을 제안하였다. 두 개의 방에 인간과 컴퓨터가 각각 들어가 있다고 할 때, 외부에 있는 사람이 방 안에 있는 대상과 채팅으로만 대화를 나누어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컴퓨터인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컴퓨터에게 지능이 있다고 보자는 것이다. 이처럼 인공지능 프로젝트는 그 시작부터 인간에 대하여 기능론적인 관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후 몇몇 학자들은 인간과 유사한 지능을 지닐 뿐 아니라 로봇이라는 몸체까지 지니는 인공지능이 심지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기능론적으로 뛰어난 인공지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및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가운데서 경험되는 사랑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만이 여전히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둘째, 인공지능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 3:10).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땅히 하늘의 일, 땅의 일, 그리고 하늘과 땅을 잇는 일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3:12-13). 이러한 시선으로 인공지능을 바라볼 때, 그리스도인은 우선 인공지능을 과대평가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땅의 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늘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 하나님 아버지와(마 6:10) 하늘과 땅을 잇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딤전 2:5) 시선을 빼앗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인공지능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그것이 현대에 이루어지는 땅의 일들 중 가장 현저하게 눈에 띄는 현상임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 이후에라야,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일 중 하나인 인공지능을 하늘의 일 및 하늘과 땅을 잇는 일과의 연관성 하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인공지능 시대에 질문할 뿐 아니라 답을 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는 인공지능에게 잘 질문하고 그로부터 답을 얻는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명제에 반대한다. 과학철학자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은 과학주의를 비판하며 “철학이 질문하고 과학은 답한다.”라는 식의 구도가 결국엔 철학의 자리를 소멸시킬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 퍼트남이 이러한 논지를 펼치며 겨냥한 과학주의의 상징이 인공지능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에 필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이 질문하고 인공지능은 답한다.”라는 식의 구도는 결국엔 인간의 자리를 소멸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보다 “우리는 왜 사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인공지능으로부터 답을 얻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여러 시대를 아울러 교리문‘답’의 형태로 신앙 교육의 표준을 세워 왔다는 점이 주목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 항목이 대표적이다. “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답.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인공지능 리터러시는 요긴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정통적이고 전통적인 신앙의 모습 외의 무엇이 추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읽고, 그리스도로 세상을 읽어낼 세계관적 안목을 갖추며,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으면 족한 것이다.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에게 배반당하고 섬기던 상관에게 오해를 사 감옥에 갇히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세계와 자신의 인생을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제서야, 크게 근심하며 자신에게 질문을 가져온 술 관원과 떡 관원에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읽어내야 할 것이 인공지능이든 혹은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요셉이 하였던 것 같은 고백과 이웃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이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창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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