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존재만으로도 아름답다, 귀하다, 충분하다...
그 의미에는 동의하지만 막상 성과주의 사회에서 이 가치를 실천해오기란 쉽지 않다. 대학을 졸업한 후 기독교 대학 교목실에서 간사로 일했을 때도, 이후 병원의 개발·협력 사업팀에서 근무했을 때도, 대학원에 들어온 지금도 어려운 건 매한가지다. 3년이 넘는 간사 생활은 실제로 행복하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이력서를 쓸 때면 이 경력이 과연 도움이 될까 걱정했고, 면접에서 관련 질문이 들어올 때면 설명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그다음에 들어간 회사에서는 이미 개발·협력 경력이 한가득한 실력자들 속에서 위축되기도 했고, 업무를 따라가느라 혼자 몰래 회사에 나와 밤낮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현재 대학원도 약자를 돕고 싶다는 마음에 한껏 기대를 품고 진학했지만, 너무나 명석하고 성실한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며 이곳이 내가 들어올 곳이 맞았나 의심하기도 했다. 이렇듯 여태 내 삶은 어떻게 해야 내가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보일지, 나의 가치를 어떻게 증명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아등바등 살아온 가치투쟁의 연속이었다.
지난 봄, 한 사역자 친구에게 이런 고민에 대해 나눴고, 그 친구는 나에게 생각을 전환하는 대답을 해줬다. “존재 자체에 힘이 있어. 존재는 그 시간, 그 장소에 오직 하나만 가능해. 어떤 사람이 어느 장소에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시간에 다른 곳에 있을 수 없고 그래서 그 존재 자체가 매우 귀한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장소의 분위기는 바뀌어. 그게 존재의 힘이야. 네가 무엇을 해냈는지와 상관없어. 네가 이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곳은 예전과는 다른 곳이 된 거야.” 이 대화의 잔상이 계속 내 안에 남았다. 그러고 보면 성과와는 별개로 누군가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 공간과 공동체는 항상 영향을 받았다.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던 존재의 힘이 진심으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 또한 내가 무언가를 잘해서 일이 이루어진 경우가 거의 없다. 남들이 보기엔 운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 인생에 가득했다. 하나님은 적재적소에서 재정으로, 사람으로, 환경으로 나에게 필요한 도움을 그때마다 제공해 주셨다. 이렇게 나의 하루하루가 하나님 없이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분의 도우심은 아주 세밀한 곳에까지 뻗어있다. 그리고 그 선물은 내가 받을 자격이 있거나 쟁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냥 주셨다. 그래서인지 내 삶은 언제나 하나님이 붙들어 주고 계신다는 그 안정감 안에서 감사함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대학원도 마찬가지다. 이곳에 보내신 이유를 뚜렷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은혜로 길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내 인생이 언제나 그랬듯 조금씩 보여주시는 뜻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나중에 뒤돌아봤을 때 내 삶의 그림이 더욱 선명하게 보일 것을 기대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혜는 왜 주시는지, 그리고 우리의 가치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이 답에 대한 실마리는 이번 겨울 참석한 한 기독교 특강에서 얻을 수 있었다. 강연 속 목사님께서는 현대 성과주의 사회에 안타까움을 드러내시며 존재적 가치를 강조하셨다. 핵심내용은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해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아서 그 사랑이 우리를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제적 사랑이 우리의 자격 여부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랑을 지금의 생활과 연결해보지 못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치의 근거가 내 안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은, 현대 사회에서의 자기증명의 압박 속에서 조금은 자유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그럼에도 나를 포함한 요즘 청년들은 진로나 사회생활에 대한 고민이 매우 많다. 청년들은 매번 나를 증명해야 하는 삶에 피로를 느끼지만 그 굴레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앞선 내용처럼 우리의 존재 자체에 이미 힘이 있고, 성과에 상관없이 가치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면 좋겠다. 가치의 근거가 우리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빛과 소금은 존재만으로도 밝게 하고 짜게 한다. 빛을 무지개색으로 아름답게 만들지 않아도, 소금에 미네랄과 온갖 좋은 성분을 추가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그곳에는 이미 차이가 발생한다. 이렇듯 우리는 존재만으로도 우리가 있는 곳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바쁜 자기증명의 세상에서도 조금의 안식을 누리며, 우리 모두 기대하는 마음으로 담대히 나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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