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로타 크라이식(Lothar Ernst Paul Kreyssig, 1898-1986)은 바이마르(Weimar)와 나치(Nazi) 시대 독일의 기독 판사였다. 그는 소위 ‘T4 작전’(Aktion T4)으로 불린, 나치 독일의 우생학 사상에 따라 행한 장애인 안락사 정책에 대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다는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이를 반대한 유일한 법관이었다. 2차 세계 대전 후, 그는 다시 판사직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 그 대신 그는 독일이 침략한 국가들, 특히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위해 ‘화해를 위한 평화봉사단’(ASF: Aktion Sühnezeichen Friedensdienste)을 설립하여 진정한 성경적 화해를 시도했다. .
‘화해를 위한 평화봉사단’은 나치 시대 독일 개신교회의 실패와 히틀러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어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화해와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봉사단체로 1958년에 크라이식에 의해 창립이 추진되었다. 크라이식은 고백 교회 내에서 저항하면서 같은 생각을 하던 마틴 니묄러(B. Martin Niemöller, 1892-1984) 목사, 구스타브 하이너만(Gustav Heinemann, 1899-1976), 엘리사벳 슈미츠(Elisabeth Schmitz, 1893-1977) 및 프란츠 폰 함머슈타인(Franz von Hammerstein, 1921-2011)와 함께 전쟁 기간 중 교회의 실패를 언급하고 참회를 촉구했다.
하지만 전후 독일교회와 사회는 나치 시대에 그들의 역할을 현실적으로 평가하는 데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생존자들에게 다가가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잔인한 상실하고 이전 이웃의 손에 굴욕을 당하고 탈출한 후의 삶에 관심을 두기조차 꺼렸다. 미하엘 보데만(Michael Bodemann)이 그의 책 <기념극장: 유대인 공동체 및 그들의 독일 이해 Gedächtnistheater: Die jüdische Gemeinschaft und ihre deutsche Erfindung>에서 설명한 생존자의 꿈은 생존자의 갈망, 정확히는 용서에 대한 요청 등에 대해 알려준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실현되지 않았으며 공감의 기색은 없었다.
크라이식은 1954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교회의 날 행사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지적했으나 그의 호소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침내 1958년 4월 26일부터 30일까지 독일 개신교회 총회가 서베를린-스판다우(Berlin-Spandau)와 동베를린-바이센제(Weissensee)에서 교대로 열렸다. 당시에 이미 동서독 분할이 완료되었지만, 독일 개신교회 총회는 여전히 독일 개신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총회였으며, 그 자리에서 서독 개신교회와 동독 개신교회 총회가 함께 토론했다. 이 총회의 마지막 날, 크라이식은 총회장으로서 화해를 위한 평화봉사운동 창설을 위한 호소문을 낭독하면서 전후에 태어난 독일 청년들이 이전에 독일이 침략했던 곳으로 가서 사죄와 평화를 구하면서 실제적인 사역을 통해 화해의 상징이 되자고 주장하였다.
그의 호소문에서 그는 먼저 독일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류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반역으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몰살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고, 또한 살아남았고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것을 막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음을 고백했다. 나아가 그는 화해가 너무 적기 때문에 독일인들이 아직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면서 그들이 13년 동안 침묵의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라도 양심적으로 순전히 정치적인 결정을 내릴 필요성과 관계없이 정말로 용서하고 용서받고 이러한 신념을 실천할 때 여전히 자기 정당화, 비통함, 증오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폭력을 당한 민족들에게 우리가 그들의 땅에서 우리의 손과 돈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마을, 정착촌, 교회, 병원 등 화해의 표시로 원하는 무엇이든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큰 피해를 준 폴란드, 러시아, 이스라엘부터 시작합시다.”(Weiß, 1998: 455-456)
그러자 적지 않은 회원들이 이 호소문을 지지하고 서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자신을 정당화하며 큰 증오를 나타내면서 그의 제안을 유토피아적이고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크라이식은 함께 죄를 인정하면서 구체적인 결과를 요구했다. 그의 겸비한 태도는 속죄의 개념을 온정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그는 참여하고 행동하며 대화를 통해 배우려는 의지를 나타냈다.
1956년에 그가 처음 이 제안을 했을 때는 지지자들이 별로 없어 낙심할 수도 있었으나 절대 포기하지 않고 1958년에 다시 제안하여 적지 않은 동조자들을 얻었고 마침내 1959년부터 구체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제안은 얼핏 이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였고 전후 세대에게 호소하였고 그들이 자원하면서 이 사역은 시작될 수 있었고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되었다.
또한, 그의 화해 사역은 당시 동독에서 개신교와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하는 연합 운동이었다. 이것은 당시에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크라이식이 마그데부르크에서 가톨릭 공동 의장인 귄터 제르헨(Günter Särchen, 1927-2004)과 함께 일했을 때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독일인이 그들이 침공한 나라의 국민과 화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사역을 하면서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가 협력하면서 화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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