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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의 일곱 가지 삶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곱 가지 삶> / 요한 스넬(Johan Snell) / 최용준 역 / 예영 / 2026 / 519쪽.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그리스도인의 선한 청지기적 사명을 다시 일깨운, 신칼뱅주의 운동을 기초한 신학자였다. 동시에 네덜란드의 정당, 반혁명당을 설립하고 수상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언론인,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세운 교육가였다. 따라서 카이퍼의 삶과 사상을 다룬 책들이 이미 많이 있었다. 20세기에 발간된 카이퍼에 관한 전기만도 열두 권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516면). 이 위에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요한 스넬(Johan Snell)를 통해 2020년 또 하나의 카이퍼 전기가 추가되었다. 바로 오늘 소개하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곱 가지 삶>이다. 이 책은 단순한 연대기적 전기가 아니라 ‘일곱 가지 삶(역할)’이라는 독특한 구성을 통해 카이퍼의 다층면적 정체성을 보여준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카이퍼의 그 일곱 가지 측면의 삶은 다음과 같다.
첫째, 등산가. 카이퍼는 열정적인 등산가였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 모음집, <자아상>(1912)에서 “25년 동안 스위스, 티롤, 피레네, 노르웨이, 미국 등에서 등반에 몰두했다.”라고 밝혔다, 또 영국 저널, <더 가디언>은 1920년 카이퍼가 사망하자 “그는 당대 최고의 등산가 중 한 명이었다”라고 회고했다.(79면). 카이퍼는 알프스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사색과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그에게 등산은 ‘자연 속의 고독’이라는 선물을 통해 자신의 사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카이퍼는 정치가, 신학자, 언론인일 뿐아니라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장엄함을 누렸던 사람이었으며, 영적 재충전을 위해 몸도 잘 사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123-124면).
둘째, 여행가. 카이퍼는 유럽, 미국 등 세계를 광범위하게 여행한 사람이었다. “산악여행과 마찬가지로 여행 또한 카이퍼에게는 신성한 의무였다.”(129면). 그는 특별히 거의 매년 영국에 갔고, 그때마다 가지고 온 자료와 정치적, 문학적 즐거움으로 삶이 풍부해 졌다는 회상을 80세 무렵 회상했다.(132-134면). 특히 그는 대서양을 횡단한 1898년 가을의 미국여행에서는 2주 동안 6차례에 걸친 기념비적인 스톤 강좌(Stone Lecture)를 프린스톤에서 수행하기도 했다(183-184면). 그는 여행을 하며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것은 카이퍼가 네덜란드를 넘어 초국가적 지성인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 연설가. 카이퍼는 대중을 사로잡는 탁월한 연설 능력의 소유자였다. 2002년, 역사학자 헹크 뜨 펠드는 카이퍼의 열정적 연설이 “네덜란드 정치에 새로운 스타일이었고, 이는 당시 여러 나라에서 인기를 끌던 유형이었다.”(197면)라고 했고, 요한 스넬은 “그는 거의 언제나 연단에서 군중들의 따뜻한 찬사를 받았다. 70세가 되었을 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빛났다.”라고 썼다(244면). 카이퍼의 이 달란트는 자신의 정치, 교회, 사회 운동에서 중요한 수단이었고, 그의 영향력은 ‘글’로서 뿐아니라 ‘말’로서도 대단했다는 것이다.
넷째, 학자. 카이퍼는 1855년 레이든대학에 입학한 이래, 철학, 고전문학, 신학을 배우며 학자로 성장했고, 자신이 설립한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교(VU)에서 20년 이상 교수로 재직하며 철학, 문학, 신학을 가르쳤다. 특별히 자신의 최고 역작으로 평가받은 <신학백과사전>(1894)과 기념비적인 프린스톤신학교 강연을 엮은 <칼뱅주의 강연>(1898)을 남겼으며, 세 권짜리 <일반은총>(1902-1905) 등을 통해, 신칼뱅주의 세계관에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288-289면). 신학에서 여러 영역을 계속 확장되었던 그의 저작들은 이른바 ‘공공신학’의 선구적 결실이다.
다섯째, 활동가. 카이퍼는 왕성한 활동으로 1874년 이후 천 개 이상의 만평이 되기도 했는데, 이 책의 요한 스넬이 “역사적 인물중 카이퍼 만큼 많은 이미지가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평할 정도였다.(305면). 카이퍼는 노동문제, 사회정의, 교육의 자유 문제 등에 활동가로서 적극 개입하였다. 특별히 그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영향력이 약한 평범한 대중, 이른바 ‘서민들’(kleine luyden)을 위한 정치에 최선의 힘을 다한 활동가였다. 했다(336-337).
여섯째, 언론인. 카이퍼는 반혁명적 성격의 신문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던, <드 스탄다르드>(De Standdrd, 1872)의 창립자, 편집자, 소유주였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수만 편의 글을 집필했고 그것을 통해 여론 형성에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그의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서의 강력한 활동은 1901년 총리직에 취임하면서, <드 스탄다르드>의 편집장을 포함한 거의 모든 공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지속되었다.(390면).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시대를 대표하는 ‘미디어 인풀루언서이자 대중 사상가’였다.
일곱째, 정치가. 카이퍼는 최초 네덜란드의 근대적 정당인 ‘반혁명당’을 조직했고, 네덜라드 총리(1901-1905)를 역임했다. 그는 네덜란드 총리로서 다섯가지 업적을 이루었다. 1) 철도 파업을 종식시킴. 2) 영국 정부와 협상하여 보어전쟁을 종식시킴. 3) 주류법, 4) 자유대학을 포함한 초등학교 및 대학교에 대한 교육의 자유 실현. 5) 델프트공과대학을 대학 수준으로 격상시킴.(399면). 그는 ‘영역주권’(sphere sovereignty) 입각해서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세상 변혁을 위한 정치에 성공적으로 연결시킨 그리스도인이었다.
독자들은 이 책의 내용을 통해서, 신학자와 정치가로서의 아브라함 카이퍼만이 아닌,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해서 풍성한 삶을 산, 당대에 가장 유명했던 한 네덜란드 그리스도인의 초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전하는 특징을 몇 가지로 종합하면 특징을 다음과 같다. 첫째, 카이퍼는 다층면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다. 둘째,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하여 어떻게 전방위적으로 삶을 펼쳐나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셋째, 카이퍼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매우 진보적 민주주의자였다. 넷째, 동시에 뜻을 함께한 동지들과 적들에게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어진 인물이기도 하였다. 새로운 자료들을 바탕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삶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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