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성욱아, 이제 조금만 지나면 창조주의 존재 자체는 아무도 거부할 수 없게 될 거야. 단지 그 창조주가 하나님인지, 알라인지, 다른 종교의 신인지를 놓고 싸우게 되겠지!”
2004년 어느 저녁, 동아리 모임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길, 당시 동아리 회장님이 필자에게 해 준 말이다. 동아리 이름은 RACS. 원래 KAIST의 젊은지구론 창조과학 동아리였지만, 1990년대 말부터 지적설계에 관심을 넓혀, 필자가 가입한 2004년에는 지적설계를 중심으로 공부하는 모임이 되어 있었다.
멤버들은 바이오시스템 전공(유전자·정보 분석)과 이론물리학 전공(우주의 기원·변화 연구, 필자 포함)으로 나뉘었다. 배경은 달랐지만, 신실한 신앙인이자 제대로 된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공통의 갈망이 있었다. 단순한 직장선교가 아니라 과학기술 자체에도 기여하길 원했고, 하나님 없이 모든 기원을 설명하려는 분위기에 의분을 느꼈다. 동시에, 널리 알려진 창조과학의 ‘증거’ 중 일부가 틀렸거나 검증이 부족하다는 점, 문자적 성경 해석에서 연구를 출발하는 방식이 우리 전공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자신의 전공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싶었다.
그 대안이 지적설계였다. 지적설계 운동은 1990년대 초 미국에서 다윈주의 진화론이 생물에 대한 유일한 과학적 해법인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했다. 법관 출신 필립 존슨은 다윈주의가 자연주의 세계관을 전제한 이론이라 비판했고, 생화학자 마이클 베히는 <다윈의 블랙박스>에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제시했다. 박테리아 편모, 혈액 응고처럼 여러 하위 구조로 이뤄진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시스템에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기능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 점진적 진화로는 설명이 어렵다는 주장이다. 수학자 윌리엄 뎀스키는 이를 ‘특정 복잡성’ 개념으로 정식화했다. 어떤 사건이 뚜렷한 패턴을 지니면서도, 우연히 일어날 확률이 우리 우주 전체를 기준으로 10⁻150보다 낮다면 설계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지적설계는 과학적 언어와 방법론에 집중하고, 과학이 다루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지적설계는 문자적 성경 해석에서 출발하는 전통적 창조과학이나 진화론을 수용한 채 신학적 간극을 메우려는 유신론적 진화론과는 다르다. 어떤 생물 시스템에 설계가 개입했는지에만 관심을 두고, 그 설계가 단번에 이루어졌는지, 점진적 과정을 거쳤는지는 열어 둔다. 이 덕분에 양쪽을 포용할 수 있고, 실제 과학 연구와 비그리스도인 동료들과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 우리에게 매력적이었다.
2000년대 중후반, 우리는 두꺼운 원서를 번역하여 토의하며 지적설계의 두 쟁점을 붙들고 있었다. 첫째, 베히가 말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도 점진적 진화로 형성될 수 있다는 반대 논변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둘째, 다중우주를 가정해 우연의 기준값을 사실상 0으로 만들고, 설계를 감지할 수 없다고 하는 주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다. 우리는 점진적 진화로는 설명 불가능한 시스템을 찾아 증명하고, 다중우주가 있더라도 우연의 기준값을 본질적으로 바꾸지 못함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RACS는 이 과제를 완전히 풀지 못했다.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 진화로 불가능함을 보이려면 모든 진화 경로를 검토해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중우주 이론도 관측 범위 너머에 있기에, 증명도 반증도 어려웠다. 다만 시간이 한참 지난 오늘날, 인공지능의 발달로 이러한 복잡성을 컴퓨터로 모사해 볼 수 있게 되었고, 다중우주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던 우주론의 핵심 문제들도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더 큰 문제는 지적설계가 너무 이른 시점에 정치적 논쟁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는 점이다. 2004년 미국 일부 지역에서 교과서에 진화론과 함께 지적설계를 대안으로 포함하려 했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를 지지했다. 이미 이라크 전쟁 등으로 우파 근본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인물이 지적설계를 옹호하면서, 학계 내부 논쟁은 곧바로 정치적·사회적 전선으로 번졌다. 그 결과 지적설계는 기존 창조과학과 비슷한 수준으로 과학계에서 밀려났다.
지금 지적설계는 방법론적으로 더 발전할 기회를 상당 부분 잃었고, 이를 강하게 옹호하는 이도 많지 않다. 비기독교 진영은 물론, 기존 창조과학과 유신론적 진화론 모두에게서 공통의 비판 대상으로만 소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지적설계가 추구했던 목표, 곧 비그리스도인도 참여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려는 시도는 여전히 의미 있는 목표라고 믿는다.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이제 소장 연구자나 중견 연구자로 성장했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지적설계의 문제의식을 잇는 실제 연구를 이어 갈 가능성도 남아 있다.
그때도 느꼈지만, 설령 정상적인 연구 끝에 설계라는 결론에 이른다 해도 누군가는 반발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신을 부정하거나 다른 종교를 내세울 것이다. 지적설계를 여전히 옹호하는 필자는 그 이후는 더 이상 과학자의 싸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기야말로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장님이 했던 그 선포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어쩌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가 우리가 과학자로서 붙들 수 있는 최선의 목표라는 믿음만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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