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생성형 인공지능(AI)이 화단의 풍경을 뒤흔들며 시각 이미지를 출중하게 재현해 내는 요즘에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알고리즘이 단숨에 뽑아내는 휘황찬란한 결과물의 범람 앞에서 과연 기계의 무결한 ‘생성’(Generation)과 인간의 고독한 ‘창조’(Creation)를 가르는 기준점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그 단서를 데이터나 기술의 고도화가 아닌, 우리가 입고 있는 ‘신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들이 혼신의 힘으로 성취해온 역사는 신체성이 결여된 디지털 연산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인간 창조성만의 고유한 영토를 증언한다.
폴 세잔(Paul Cézanne)이 고향의 생빅투아르 산을 수천 번 바라보며 마주했던 실존적 고뇌는 테크닉의 부족이나 능력의 한계 때문은 아니었다. 작가는 눈앞의 산(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화가(주체)의 경계가 무너지고, 산이 화가의 몸을 빌려 스스로를 화폭에 드러내는 상태에 이르고자 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세잔의 작품을 인간이 세계와 맺는 원초적인 지각적 소통이라고 기술하였다.
자연이 인간의 신체에 부딪혀 오는 원초적이고 날것의 경지를 포착하려 했던 세잔은 자신이 사물에서 발견한 쪼개진 색면의 덩어리들이 혹여 안질이라는 신체적 결함이나 사고에서 비롯된 착각이 아닐까 괴로워했다. 사과 한 알을 온전히 표현하고자 수십 차례의 지우기와 덧칠하기 등 산고를 치르며, 그럼에도 자신이 도달하고자 한 단계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자책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예술가의 근성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창조주가 피조세계에 숨겨두신 변하지 않는 구조를 붙잡으려는 시도였다.
반면 인상주의의 거장 클로드 모네(Claude Monet)가 말년에 지베르니 정원에서 직면했던 고뇌는 창조 세계의 수면 위에 내리쬐는 시간의 흐름 속에 스러져가는 ‘순간의 소멸’을 붙잡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수면의 진동을 포착하려는 그의 야망은 말년에 찾아온 백내장이라는 복병을 만나 크게 흔들렸다. 세상이 둔탁한 황갈색 안개 속으로 침전되고, 수술 후에는 사물이 왜곡되고 온통 푸르게 보이는 청시증(Cyanopsia)의 후유증 속에서도, 그는 팔레트 위 물감의 순서에 의지한 채 간신히 <수련> 연작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에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오랑주리 미술관에 소장된 클로드 모네의 <수련>
전시를 몇 주 앞둔 모네는 15점 이상의 <수련> 작품을 소각해 버렸다. 당시 프랑스 총리였던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는 모네가 기증하기로 약속한 오랑주리 미술관의 벽화마저 파괴해 버릴까 싶어 모네를 달랬다고 한다. 신체적 한계와 표현의 불가능성 앞에 마주 선 모네의 무력감은, 점차 무너져 가는 육신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처절한 실존을 보여준다. 세잔이 사물의 구조를 찾으려 순간을 포기했다면 모네는 <수련>을 통해 순간의 오묘함을 포착하려 구조를 포기하는 상충된 측면을 보였으나, 두 사람 모두 육체적 한계를 무릅쓰고 작업을 지속했다.
이러한 거장들의 예술적 실천은 메를로-퐁티가 주장한 “회화는 눈이 아니라 몸으로 경험되는 현상”이라는 미학적 명제를 육화한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봄(Seeing)’이라는 행위는 세계를 멀리서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데카르트적 카메라 렌즈 같은 시각과 구별된다. 그것은 캔버스 주위를 서성거리고, 재료들과 옥신각신 씨름하며, 지쳐가는 근육의 긴장과 촉각이 실타래처럼 얽힌 전신(全身)의 총체적 사건이다. 화가는 세계를 밖에서 관찰하는 투명한 지성이 아니라 세계라는 거대한 ‘살(Chair)’ 속에 파묻혀 함께 호흡하는 육화된 의식, 즉 ‘몸-주체’이다. 이는 성육신의 신비처럼, 인간의 예술적 실천 또한 육체를 통과할 때 비로소 진실해짐을 보여준다. 회화는 무결한 눈의 기록이 아니라 취약한 몸이 세계와 충돌하며 자아낸 가역적 사건의 흔적이자 감각의 퇴적물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의 창조물과 예술가들의 마스터피스를 가르는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데이터화된 거장들의 화풍을 규칙에 따라 최적의 아웃풋을 뽑아내지만, 거기에는 ‘신체’가 결여되어 있다. 인공지능은 세잔을 밤낮으로 괴롭혔던 지독한 회의를 알지 못하며, 모네의 시야를 흐려놓았던 백내장의 황갈색 안개를 경험할 수 없다. 기계의 연산은 노화도, 굶주림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알지 못하기에 그 어떤 ‘실존적 진실’도 담아내지 못한다. 모래 속에 발가락을 넣고 꼼지락거렸을 때의 감촉과 숲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 들풀 위에 맺힌 이슬방울을 보다가 문득 경이감을 마주하는 순간을 과연 인공지능이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 우리가 만끽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감수성을 일으키는 시어를 써내려 가는 예술가들에게 신체는 기계의 ‘비육신화(Disembodiment)’로 달성할 수 없는 생(生)의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지각의 성소’이다.
결국 예술적 창조의 특성은 기계적 계산의 완벽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부여받은 주체가 창조 세계를 지각하고 체험한 바를 온몸으로 실어내는 성육신적 응답에 있다. 인간의 창조성은 ‘하위 창조자(Sub-creator)’가 삶의 세계를 관통하면서 겪는 실존적 진실, 그리고 소명의 땀방울 속에서 한층 그 놀라운 신비가 증명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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