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경청의 정치 공동체를 만드는 교회

2004년 1월 19일, 세계가 주목한 두 인물의 만남이 있었다. 한 사람은 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되는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다른 한 사람은 ‘공론장’(Öffentlichkeit)의 개념을 제시한 현대 철학의 거장 위르겐 하버마스였다. 각각 신앙과 이성으로 대표되는 두 사람은 만남을 통해 서로의 말을 귀담아들었고, 종교가 지닌 통찰이 이성의 한계를 보완하고 공동체를 지탱하는 중요한 힘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정치 공동체의 일이 종교와 분리될 수 없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가 쓴 <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도 그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미국이 다른 국가들이 닮고자 하는 모델의 지위를 상실했음을 안타까워하며, 그 원인을 ‘시민교양’(civility)의 붕괴에서 찾고 있다. 그가 말하는 시민교양이란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 곧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 그리고 이로부터 비롯되는 표현의 자유에 기반한 정신을 의미한다.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E pluribus unum)의 미국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상황을 보며 저자는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개념과 유사한 ‘공적 광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정치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서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의 회복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역할을 다해야 하는 주체가 바로 교회이다. 저자가 강조하듯 종교와 정치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 ‘정교분리’가 본래 의미하는 바는 정치권력이 종교적 사안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종교가 정치 공동체의 문제를 도외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정교분리 확립의 역사가 한 공동체, 더 나아가 한 개인의 종교를 결정할 권리에 관한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는 개인의 존엄성을 지탱하는 제일의 원리이며, 교회는 정치 공동체의 기반을 지탱하는 ‘첫 번째 정치제도’이다. 따라서 교회는 정치의 문제, 곧 어떠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것인지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이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교회가 시민사회의 주축으로 바로 서서 공론장에서 자신의 몫을 다할 때, 다양한 목소리가 존중되며 국가의 영역이 개인의 본질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건강한 사회가 형성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공적 광장이 바람직한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우선 종교의 가치를 배제한 ‘벌거벗은 공적 광장’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종교를 정치의 문제에서 완전히 차단하는 세속주의적 방법은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분란만을 더욱 조장할 뿐이다. 다양한 종교적 가치를 배제한다는 계획 자체부터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본질적인 침해이다. 또한 이렇게 설립된 공적 광장에서는 세속주의라는 ‘단일종교’가 공론장을 지배할 우려가 있다. 무엇보다 그러한 광장의 설계자들이 강조하는 ‘관용’은 강자가 약자를 향해 베푸는 호의라는 측면에서 타인에 대한 강압이나 심하게는 폭력의 도구로 변질될 수 있다. 세속주의적 공론장은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실제로는 많은 구성원의 이야기를 차단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신성한 공적 광장’을 지향점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교회 혹은 기독교가 공적 영역에서 특혜를 받도록 하는 ‘신성한 공적 광장’의 구상은 일견 구미를 당기게 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공적 영역에도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벌거벗은 공적 광장’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교회에 위험하다. 우선 정치권력의 비호를 받는 교회는 생명력을 잃는다. 만약 교회가 공적 영역에서 특혜를 얻기 시작한다면, 교회는 국가가 주장하는 바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국가의 논리와 어긋나는 이야기를 했다가는 특권을 잃게 되므로, 국가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성경에 기초한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오히려 국가의 불의한 행위를 옹호하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추종하게 된다. 교회와 정치의 유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권력을 위한 ‘쓸모 있는 바보’ 내지 ‘유순한 보병’이 된다. 나치 정권의 정책을 지지하는 데에 앞장섰던 주체가 당시 독일 교회였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적 영역에서 교회에 특권을 주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격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려면 교회는 정치적 특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저자가 강조하듯 교회가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정치적인 영향력은 더 커질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한 해결책을 우리 사회에 직접 적용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미국과 한국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저자가 강조한 시민교양 혹은 공동선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중요하다면, 한국에서는 공동선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이 급선무일지도 모르겠다. 민주화 이후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워진 한국 사회이지만, 공동체 차원에서 어떠한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고 생각된다. 이에 우리 한국교회는 이러한 이야기가 공적 광장을 통해 활발하게 나누어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현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했던 ‘듣는 마음’일 것이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설령 불편하거나 틀리더라도, 들을 수 있는 용기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교회가 경청할 용기가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에 앞장섬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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