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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인 삶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윤리적인 삶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것은 바리새인의 입장이었고 예수님은 이에 동의하지 않으셨다. 물론, 윤리적인 삶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최대 목적은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성경의 가르침을 잘 요약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라고 제시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은 바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는 믿음 외에도 예배, 찬양, 감사, 전도 등도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그 순종의 핵심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더 행복하게 하는 것보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노동착취 등으로 이웃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는 것이다. 윤리는 십계명의 “...하지 말라”라는 명령처럼 주로 소극적이다.
사람은 예외 없이 고통을 싫어한다. 죽음보다 더 싫어한다고 슈바이처가 지적했는데 안락사나 자살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고통을 가하면 안 된다. 어떤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했을 때이다. 철학자 밀(J. S. Mill)은 이것을 “위해성의 원칙”(Harm Principle)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윤리란 다른 사람에게 가해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 직접으로, 간접적으로 고통을 가하지 않는 것이다.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아와 과부처럼 약자들이기 때문에 모든 비윤리적인 행위는 정의에 어긋나고, 약한 사람들을 특별히 보살피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진노케 한다.
그동안 종교들이나 칸트를 위시한 철학에서는 윤리의 초점을 악행으로 고통받는 이웃 대신 행위 주체의 ‘선한 동기’에 두고 있다. 물론, 동기가 선해야 이웃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이웃의 고통보다 자신의 선한 의지에 초점을 두는 것은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윤리의 초점은 자신의 선한 동기가 아니라 이웃의 고통에 맞추어야 한다.
행위 주체 중심의 윤리는 특히 오늘날에 시대착오적이다. 사회학자 베버(Max Weber)는 정치에는 선한 동기를 중요시하는 동기윤리(Gesinnungsethik)가 아니라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ik)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은 정치뿐만 아니라 모든 윤리는 책임윤리여야 하고, 특히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과거에는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는 주범이 주로 자연이었지만, 이제는 사회가 우리의 주된 현실이 되었고 루이스(C. S. Lewis)는 오늘날 사람이 당하는 고통의 5분의 4는 다른 사람이 가한다고 했다.
물론, 개인이 이웃에게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고통을 줄 수 있고 그런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그와 못지않게, 오히려 더, 잘못된 풍속, 제도, 법, 관행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큰 해를 끼치고, 점점 더 그렇게 하고 있다.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면 그 사회의 약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강자들은 이익을 본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중요해질수록 자연이 가하는 것보다 사람이 가하는 고통이 더 커지고 심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 개인의 의도가 악하지 않고 옆에 있는 이웃에게 공정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제도, 풍속, 법, 관행 등을 통하여 부당하게 이익을 보면 약자들은 그만큼 손해를 보고 그만큼 고통을 당한다. 그러므로 사회를 통하여 이익을 보면서도 개인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고 심지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으로 도덕적인 줄 착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네팔의 책임은 0.01%에 불과하다 한다. 그런데 한국을 비롯한 모든 선진국 국민들의 사치와 과소비로 지구의 온도가 높아져 빙하가 녹아 수많은 네팔인이 목숨을 잃고 생존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졌다. 이런 상황은 공장이 거의 없어 지구온난화에 아무 책임도 질 수 없는 몽골이 사막화되고 국토가 거의 다 바닷물에 잠기고 있는 투발루에도 벌어지고 있다. 모든 선진국 국민들은 그들 주민들의 죽음과 고통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며, 이런 잘못을 방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런 상황은 지구온난화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강대국 국민들의 과소비와 낭비, 공정하지 못한 모든 국제관계가 약한 나라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윤리적인 삶은 모든 사람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윤리적으로 살면 이방인들도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섬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성경이 지적하고 그렇게 살라고 명령한다(마 5:16, 벧전 2:12). 개인적으로 윤리적으로 살고 가정, 직장, 지역사회뿐만 우리나라와 세계 전체가 좀 더 평화롭고 정의롭게 되도록 각종 사회 운동을 펼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복음 전파도 더 효과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안타깝게도 최근 한국교회는 이에 성공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구원과 복에만 지나친 관심을 쏟고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영광은 소홀히 함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좀 더 책임 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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