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오늘의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크게 발전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오히려 약화되고 있다. 그리스도인 역시 개인의 구원과 경건에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삶의 현장에서 정직·공정·책임·희생·약자보호를 실천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더욱이 신앙을 공적으로 드러내려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진영논리와 혐오, 갈등의 언어에 사로잡히는 현상도 나타난다. 이에 이번 호 ‘사람 사이’는 오랫동안 기독교윤리, 신앙과 삶의 일치, 사회적 책임, 약자 중심의 윤리, 시민운동과 정의를 강조해 오신 손봉호 교수님을 통해서, 오늘날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사적 신앙’(private faith)의 한계를 넘어 ‘공적 신앙’(public faith)을 회복하고 비도덕적 사회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그 혜안을 나누고자 한다.

- 인터뷰어 : 석종준(서울대 선교사, 기독학생 북클럽 지도목사)
- 일 시 : 2026년 9월 9일(수) 오전 10시
- 장 소 : 소나무 카페(경기도 광주시 목현동)
석종준 : 교수님께서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의 세상 속의 삶을 상징하는 태도로 ‘선지자적 비관주의’를 강조해 오셨습니다. ‘선지자적 비관주의’란 정확히 무엇이며, 왜 중요하며, 이것은 단순한 비관주의나 냉소주의와는 어떻게 다를까요?
손봉호 : ‘선지자적 비관주의’라니까 용어가 너무 거창해서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경고가 아무 열매를 거두지 못할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비관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계속 외쳤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소명이며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고 외친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임무를 수행한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으로는 이룩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수행했고, 하나님의 원하시면 이룰 수 있다고 믿은 것이지요. 냉소주의나 비관주의는 이룰 수 없기에 아예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선지자적 비관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윤리 운동처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에만 적용해야 하고,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경우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동참을 강권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의 경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전자에 속하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후자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석종준 : 평소 ‘신앙과 삶’의 일치를 강조해 오셨습니다.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일치 여부에 관한 교수님의 진단, 그리고 세상에서 ‘신앙과 삶’의 이원화 결과로 나타난 모습은 무엇이 있을까요?
손봉호 : 우선 신앙과 삶의 완전한 일치는 매우 어렵습니다. ‘언행일치’란 모두에게 힘듭니다. 체면이나 위신 때문에 말은 잘 하지만 행동이 거기에 따르기는 어려우므로 위선이란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삶의 불일치가 한국교회만의 약점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 불일치의 정도가 좀 심하다는 것이지요. 이유는 많겠지만, 그 하나는 유교적 문화일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무신론이므로 ‘마음속의 경찰’이 없어서 겉치레가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이에 일조한다고 봅니다. 행위를 강조하면 자유주의로 매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언젠가 어느 교회에 특강 초청을 받았는데 이틀 전에 갑자기 오지 말라고 해요. 누가 손봉호는 자유주의 신학을 따른다고 했다는 겁니다. 윤리를 강조하는 사람은 모두 자유주의자라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은 분명 이신칭의와 더불어 순종도 매우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좀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신앙과 삶의 거리가 커진 것입니다.
석종준 : 최근 우리 사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윤리적 소신이나 ‘공적 신앙’을 드러내려 할 때, 진영논리나 특정한 정치적 입장으로 내몰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공공성’과 ‘진영논리’는 어떻게 구별해야 하고,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손봉호 : 우리 사회도 요즘 이념이 너무 중요하게 작용해서 사회 문제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도 보수 아니면 진보라고 비판을 받아요. 이념이란 단순화해서 ‘사명을 가진 정치 이론’ (political theory with mission)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는가에 대한 이론과 거기에 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함축한 것입니다. 본래 이론에는 원칙적으로 ‘사명’ 같은 게 개입되면 안 돼요. 그런데 19세기 마르크스는 자기 이론은 철저히 객관적이고 옳으므로 그 이론에 따라야 사회가 발전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주장과 다른 주장을 모두 ‘이념’(거짓의식)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마르크스주의야말로 전형적인 ‘이념’이란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어쨌든 요즘 역사 철학자들이나 사회과학자들은 역사 발전의 법칙 같은 것은 아예 없다는 것에 거의 의견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상당수 사람들은 사회발전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회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로 폄훼하고 심지어 타도 대상으로 삼기까지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종교의 힘이 약해지니까 일어나는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념적이 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념이 일종의 우상이라고 봅니다. 사회학적으로는 칼 포퍼(Karl Popper)의 ‘점진적 사회공학’(picemeal engineering)이 훨씬 더 겸손하고 합리적인 대안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사회 이론에 근거해서 사회를 전체적으로 바꾸거나 유지해야 한다는 유토피아적 전체주의가 아니라, 마치 기계의 고장 난 부분만 수리하듯 우선 분명하게 비민주적이고 정의에 어긋난 사회악과 고통을 조금씩 고쳐나가자는 주장이지요. 그러나 윤리는 이념과 다릅니다. 윤리는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해를 끼치지 말고, 약자를 보호하고, 부당하게 고통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적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회 활동은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이 아니라 성경의 정의와 윤리에 근거하되 다만 제가 주장한 ‘선지자적 비관주의’의 태도로 겸손하게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정의가 조금이라도 더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할 뿐 우리 힘으로 천국을 이룩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저기 고장난 부분을 조금씩 고쳐서 사회가 더 좋아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므로 감사할 뿐입니다.
석종준 : 약자를 돕고 섬기는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면, 오늘날 우리가 더 관심을 가지고 섬겨야 할 ‘약자’는 누구일까요? 장애인, 이주민, 노인, 빈곤층, 성 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중에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더 우선적으로 도와야 할까요?
손봉호 :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지금 당장 이 사회에서 ‘고통’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을 우선 도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고통’(苦痛)에는 ‘고’(苦)가 있고 ‘통’(痛)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고’보다 ‘통’이 더 심각해요. 아픔은 육체적인 것에 두드러집니다. 그래서 저는 장애인들이 물리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해 있고 거기에 심리적, 사회적 ‘통’이 따른다고 봅니다, 노동도 할 수가 없으므로 외부의 도움 없이는 생존조차 어려운 가장 취약한 약자라고 판단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반세기 이상 장애인 운동을 해 왔습니다. “누가 약자인가?”를 따지기 전에 바로 눈앞에서 아파하는 사람부터 돕고, 그런 사람들이 없어진다면 다음으로 사회적으로 불리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약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평소에 사치와 낭비를 절제해서 능력을 비축해야 할 것입니다.

석종준 : 어떤 그리스도인은 약자를 돕는 일을 ‘교회의 사회봉사 프로그램’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수님은 약자에 대한 섬김이 단순한 선택적 자선이나 봉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 자체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손봉호 : 저는 이 문제는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구원받는 것이라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좋기는 하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구원받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 믿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그렇게 요약하고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예배, 찬양, 기도, 회개 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제사보다 순종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순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와 사랑의 핵심은 약자 보호입니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정의이고,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는 고아와 과부와 약한 사람, 병든 사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존 롤스 (John Rawls)의 ‘최소 수혜자의 최대이익’을 도모하는 이른바 ‘차등의 원칙’이 바로 그런 정의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본적인 사명이지 부차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서 믿는 우리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순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나아가서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마 5:16, 벧전 2:11-13).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이 사회에서 ‘선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약한 사람을 도우면 이방인들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석종준 : 교수님께서는 교회가 ‘손해보고 희생하는 십자가 정신’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쟁과 자기계발, 자기 이익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손해 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손봉호 : 첫째, 우리가 자기의 능력을 개발하려고 경쟁하고 애쓰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만 누구와 무엇을 위해서 경쟁하는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하나님에게 더 큰 영광을 돌리려고 생존하고 능력을 키우는 것은 성경적 희생정신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둘째, 자신이 약자의 위치에 있을 때,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게 강자에게 양보하는 것은 경쟁자를 죄짓게 하고 불의를 강화하며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데 일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에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자신이 강자의 위치에 있을 때나 경쟁상대와 비슷한 위치에 있을 때는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이 성경적 미덕일 것입니다. 우리의 양보와 희생은 이웃의 실제적인 이익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한 것이라야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나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희생을 미화하는 것은 나팔을 불면서 구제하고 금식하는 행위 같은 위선이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석종준 : 교수님께서는 그동안 한국교회의 도덕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씀해 오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고신뢰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손봉호 : 한국교회가 사회의 신뢰를 잃은 이유에 대해서는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도 의견일치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만 하고 행동을 안 한 것, 즉 윤리적 실패”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도 ‘나토’(NATO)가 심각합니다. 즉 ‘말 만하고 행동하지 않는’(No Action, Talk Only)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말은 잘하는데, 삶은 말과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왜 말 만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지 못할까요? 복음도 전해야 하고 믿는 자의 모습은 보여주고 싶은데 힘들고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에 이릅니다(약 1:15). 욕심을 억누르는 대신 욕심을 채우고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말은 좀 적게 하고 실천에 좀 더 무게를 두되, 세상적인 것에 대한 욕심을 줄여서 손해도 감수하고 웬만하면 양보하려고 노력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정의를 매우 강조해서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약자를 돌보라는 성경의 정의는 이해하기가 매우 쉽고 구체적이며 쉽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위에서 제일 약하고 힘든 사람을 도와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을 누가 욕하겠어요?
석종준 : 우리 시대 청년들은 취업, 경쟁, 주거, 결혼, 경제적 불안 등 여러 현실적 문제의 직면한 채 살아가는데요. 그리스도인 청년들에게 “세상과 다르게 살라”라는 말이 공허한 구호가 되지 않으려면, 오늘부터 당장 실천할 삶의 내용으로 어떤 것이 가능할까요.
손봉호 : 청년들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기성세대로서 매우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만한 사회를 만들어 놓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네들보다 더 힘들었다. 우리는 사실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아예 생물학적으로 굶어가면서 살았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몇 마디 잔소리를 하고 싶습니다.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 청년들은 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시간을 아끼라고 충고하고 싶어요. 청년 때의 한 시간은 저 같은 노인의 열 시간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놀이에 왜 그 소중한 시간을 낭비합니까? 둘째, 무슨 일이든 생산적인 활동을 하라는 겁니다. 삶에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좀 힘들고 보수가 낮은 일이라도 우선 할 수 있으면 하면서 경험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셋째, 지나친 불의에 대해서는 항거해야 하지만, 지금은 우리 기성세대가 당면했던 것만큼 공익을 위해 시간을 바쳐야 할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능력을 좀 더 키우고 사회와 인간에 대해서 더 알고 난 다음에 더 성숙한 방식으로 공익을 위해 봉사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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