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받게 된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학부생 시절 교과서에서 읽었던 마틴 스콜세이지(Martin Scorsese)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영화 <기생충>은 우리 주변에서는 보기 드문 다소 특별한 인물들의 내밀한 사적 영역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 드러나는 인물들의 개인적인 모습의 기괴한 내밀함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 영화의 관객들은 극중 인물들의 욕망과 좌절 그리고 분노와 두려움에서 모두가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인간 조건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드러나는 보편적 토대 위에서 기괴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기생충>의 서사는 널리 공감되는 작품이 된다.
사적인 이야기는 특정한 개인에 국한된 것이기에 많은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적인 사정이라 하더라도 그 이야기에 알뜰하게 귀 기울여 살피게 되면, 많은 경우에 “음, 나도 그럴 수 있었겠구나”라는 이해에 이르게 되곤 한다. 어쩌면 사적인 이야기가 공감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전후 사정에 대한 ‘충분히’ 깊은 헤아림이 없었기 때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깊은 헤아림으로 풀어내는 사적인 이야기는 오히려 폭넓은 보편적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글로컬’이라는 묘한 신조어는 지역적 특수성이라는 뜻의 ‘로컬’과 보편성을 의미하는 ‘글로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극히 모순적으로 들리는 말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 지극히 사적인 것이 보편적 공감을 가져오는 창의성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비추어본다면, “가장 로컬한 것이 가장 글로벌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지역의 특수성도 충분히 깊게 탐구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탐구의 끝에서 매우 보편적인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 모든 문제는 겉보기엔 달라 보여도 그 뿌리를 찾게 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인간 조건, 삶의 본질, 모든 생의 한계와 고뇌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특정 지역의 문제에 대한 알뜰한 이해, 그 이해에서 발견되는 보다 깊은 깨달음은 그 지역의 문제를 넘어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 뒤집어 생각하면, 글로벌하지 못한 지역성은 아직 ‘충분히’ 지역적이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해 전에 성지 순례를 돌며 갈리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제법 높은 언덕 위에서 순례길을 안내해 주시던 목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때가 기억난다. “저 호수 너머 보이는 호수 변이 예수님께서 광인을 치유하신 거라사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허리를 살짝 돌리시며 “이쪽으로 보이는 저 고개 넘어가 혼인 잔치가 있었던 가나고요. 그 길로 쭉 가면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저 아래가 베드로 장모의 집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던 곳으로 추정되는 언덕도 멀리 보였다. 처음 물고기를 낚던 베드로를 부르신 곳도, 부활하시어 베드로를 찾으셨던 곳도 가까이 보이는 호숫가라는 말도 들었다. 나는 “아,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은 참으로 작은 지역에서 이루어졌구나”하는 생각에 먹먹해지는 가슴을 안고 언덕 주변을 내려다보던 기억이 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삼 년 기간 중 매우 좁은 지역에 머무르셨다. 언젠가 미국 출장을 다녀오던 중 그 출장 한번에서 미국을 왕복하는 비행 거리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삼 년 기간 내내 다니셨던 길의 길이 모두를 더한 것보다 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허탈하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예수님은 방문하셨던 지역의 범위가 작았던 것뿐만 아니라 가르치신 제자도 불과 열두 명에 그치는 아주 작은 지역적인 사역을 하셨다. 하지만, 그 사도들은 강력한 로마 제국과 방대한 유럽 그리고 온 세상을 뒤집는 새 역사를 쓴다. 지극히 지역적인 예수님의 로컬 사역이 전 지구적인 글로벌 역사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지극히 유대적이었지만, 온 세상에 영향을 끼친 예수님의 사역이야말로 ‘글로컬’이라는 수식어에 가장 걸맞는 사역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내 사역은 왜 이리 작기만 할까?”, “이 사역은 내가 그만두면 남아 있기나 할까?” 종종 우리는 이런 걱정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다. 물론 커다란 비전을 얻기 위해 주님께 간절히 구하는 일도 칭송할 만한 일이며 크고 오래 지속되는 사역을 꿈꾸는 것은 기릴 만한 일이다. 다만, 아무리 작고 오래 지속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사역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 사역이 갖는 특별함에 깊이 천착하며 한 줌에 잡힐 것 같은 적은 수의 사람들도 소중히 여기며 진정으로 그들을 알뜰히 섬긴다면 주님은 그 사역을 반드시 돌아보신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6-47)
예수님 사역의 본을 따라 우리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의 사역도 글로컬 사역으로 거듭나길 소망해 본다. 모든 학문의 지경을 주님께서 회복하시는 그 크고 가슴 두근거리는 소망을 굳게 잡되 내 손에 잡혀 주신 좁아만 보이는 학문의 지경을 더 깊이 탐구하고 그 안에 돌봐야 할 소중한 사람들을 알뜰하게 섬기는 일에 천착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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