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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가 일찍이 <행동하는 예술>(Art in Action, 1980, 신국원 역)에서 제기한 근대 미학의 도그마를 향한 문제의식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순수예술을 오직 ‘무관심적 관조(Disinterested Contemplation)’의 대상으로 가두려는 관행을 비판하며, 예술이란 삶과 동떨어진 관념적 객체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월터스토프에게 예술은 가정과 시장, 일터와 거리라는 일상적 지평 위에서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즉, 단순히 대상을 재현하고 표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삶의 한복판에서 실질적인 사건과 변화를 일으키는 실천적 행위라는 뜻이다.
이러한 통찰은 <다시 생각하는 예술>(Art Rethought, 2015)에서 한층 구체화된다. 전작이 예술작품의 자율성이라는 낡은 신화를 걷어내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 속에 어떻게 배태(胚胎)되어 있는지를 분석했다면, 이 책에서는 아예 근대적 고급 예술 제도 밖으로 시선을 돌려 ‘예술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영토를 본격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하였다.
월터스토프가 문제 삼는 것은 근대 이후 현대미술이 예술을 삶의 구체적인 실천으로부터 떼어놓았고, 이러한 분리가 예술가들의 사고와 상상력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것을 ‘근대 세계의 예술에 갇힌 터널 시야’라고 불렀다. 그 결과 작품에 담긴 ‘창작자-의미(Maker-meaning)’는 왜곡되거나 엘리트들의 지적 유희로 쪼그라들었다. 본래 예술가들은 공동체의 슬픔을 위로하거나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오면서 예술은 오직 예술계 내부의 문법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작품을 일상의 맥락에서 떼어내 하얀 벽에 박제해 버린 ‘화이트 큐브’의 폐해가 바로 이것이다. 일상으로부터 소외된 예술은 결국 세상에 참여해 ‘정의를 행하는’ 공적 생명력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그가 복구해 내려는 것은 바로 이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이 지닌 구체적인 유형들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정의’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개인의 내재적 가치와 존엄성을 마땅히 예우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먼저 링컨 기념관이나 바르샤바 게토 기념비, 벨파스트의 기념벽화, 마야 린의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 묘비석처럼 한 인격이나 사건에 온당한 경의와 존엄을 돌려주는 ‘기념 예술’이 대표적이다. 이것들은 형식적 혁신성이나 탈맥락적 미적 완성도 등에 의존하는 순수예술의 잣대와는 다른 ‘추가적인 평가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콘과 관계 맺으며 거룩한 존재에게 예를 표하는 ‘공경을 위한 예술’, 열악한 노동 조건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를 존엄한 인격체로 선언하는 ‘노동요’, 그리고 케테 콜비츠의 판화나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처럼 부당한 억압에 맞서 영혼을 내리치는 ‘사회적 저항 예술’ 역시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미적 쾌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자나 자신을 향해 기어이 정의를 실현하려는 눈물겨운 실천들이다.
이러한 ‘예술의 사회적 실천’은 현대 예술을 뒷받침해 온 두 가지 강력한 모델, 즉 아름다움만을 탐닉하는 ‘무관심적 관조’와 형식적 파괴만을 좇는 ‘예술 성찰적 예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렇다면 월터스토프가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과 이 두 유형을 대비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념과 공경, 노동과 저항이라는 사회적 실천의 심장부에는 자기만족보다는 타자나 자신을 향해 ‘정의를 행하려는(doing justice)’ 맥박이 뛰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무관심적 관조나 예술 성찰적 예술이 미학적 담론에 갇혀 예술계 내부의 혁신과 유희에 몰두한다면,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은 기꺼이 갤러리 밖 현실 세계로 뛰어들어 타인의 삶을 고양하고, 폭력에 맞서 피해자와 연대하며, 공동체의 상처를 부둥켜안는다. 예술의 형식 자체에 갇히느냐, 아니면 예술을 매개로 인간의 존엄을 되찾는 투쟁과 환대의 현장으로 나아가느냐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이 발생하는 셈이다.
제도권 미술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월터스토프의 <다시 생각하는 예술>이 던지는 경고는 결코 가볍지 않다. 현대미술이 왜 길을 잃어버렸는지, 어떻게 본래의 생명력과 사회적 의미를 상실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책 말미에서 지적했듯이 그가 ‘정의’와 예술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이른바 ‘몰입적 관심을 위한 예술’의 독점을 꼽은 것은 그가 얼마나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월터스토프는 이 책에서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현대 예술 담론이 그간 안일하게 순수예술이라는 전통을 고수하는 데 안주해 왔다면, 이제는 시야를 넓혀 삶과 유기적으로 호흡하는 예술 형태들에 눈을 돌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월터스토프에게 예술이란 고상하게 감상하는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세우고 이웃을 기억하며 삶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구체적인 ‘인간의 실천적 행위’로 기술된다. 인간에게 허락된 예술이라는 선물이 미로 속에 갇히지 않고, 깨어지고 애도하며 기념 대상에 경의를 표하는 자리로 흘러가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월터스토프가 구상했던 예술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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