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이 글은 <AI 시대와 기독교 세계관으로 다음 세대를 디자인하다>(익투스, 2025)에 게재된, 신국원의 “AI시대, 기독교 세계관으로 조명하기”의 ‘(1)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부분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개혁주의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해온 것이 특징이다. 삶 전체는 ‘하나님 앞’(coram Deo)에 있기에, ‘삶이 곧 종교’(life is religion)라고 믿어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문화를 배격하거나 무비판적으로 동화되는 대신 적극 참여하여, 변혁시키는 열정을 지녔다.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이러한 통찰을 독일 철학자들의 ‘세계관’을 채용해 ‘기독교 세계관’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목사요 신학자며 정치가이자 사회운동가였다. 그는 칼뱅주의가 일종의 철학 체계라는 인식을 막기 위해 ‘삶과 세계의 조망’(levens-en-wereldbeschouwing)이라는 다소 어색한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자신의 위기 상황을 헤쳐나갈 길은 칼뱅주의를 삶의 모든 국면에 실제적 규범으로 삼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총체적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세계관의 필요성을 강조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 유산을 토대로 더 보편적이고 체계적인 철학적 바탕을 일구어낸 것은 카이퍼가 설립한 자유대학교 출신의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 1894-1977)였다. 도예베르트는 카이퍼가 일으킨 운동이 문화의 모든 영역에 정착되려면 포괄적인 세계관 체계로 정리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도예베르트는 본래 법학자였다. 그의 철학 체계는 이성이 세계의 기초가 된다는 서구문화의 상식을 비판한다. 특히 사상 체계가 무엇이건 종교적 기초를 가진다는 점에 착안하여, 시대와 사상의 흐름을 기독교적으로 비판하고 바로잡고자 했다. ‘초월적 비판’(transcendental critique)이 바로 그 연구 결과이다. 또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이나 ‘영역주권’ 사상을 더 깊고 건실한 성경적 기초에서 해석하고 보편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최대 공헌은 서구문화 역사의 바탕에 깔린 네 개의 동인(ground motive)을 밝힌 점이다. 첫째, 가장 고전적인 것으로 그리스-로마 세계관을 꼽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을 따라 ‘형상과 질료’(form and matter)의 동인이라 불렀다. 둘째, 성경적으로 ‘창조-타락-구속’의 진리에 기초해 있다. 셋째, 스콜라철학에서 기원한 ‘은총과 자연’(nature and grace)의 혼합적 세계관이다. 성경적 종교의 동인과 그리스 종교의 동인을 하나의 체계에 종합하고자 했다. 넷째, 르네상스에서 싹튼 ‘자연과 자유’(nature and freedom)의 정신에 기초한 인본주의적 세계관이다.
주목할 것은 도예베르트가 성경적 동인 외에 다른 동인들이 융합될 수 없는 두 개의 종교적 원리들의 조합으로 되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이 구조를 ‘종교적 대립’(religious antithesis)의 성격으로 설명한다. 이 대립은 이론적 통합으로는 결코 해소되거나 통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비성경적 세계관들은 모두 다원적인 종교에 뿌리를 두기에 통일된 문화의 기초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 어느 하나가 억압된 상태로 발전하다 지나치게 되면 붕괴한다는 것을 역사적 예를 들어 보여준다. 반면에 ‘창조-타락-구속’의 하나님의 경륜에 기초한 기독교 세계관은 분열됨 없는 문화의 기초를 줄 유일한 것이라 주장한다.
카이퍼와 도예베르트 이후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네덜란드에만 머물지 않았다. 19세기 이민자들이 세운 미국의 칼빈대학교(Calvin College)와 도트대학교(Dordt College), 1967년 캐나다 토론토에 설립된 기독교학문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를 통해 북미와 남아프리카공화국, 호주와 뉴질랜드, 한국과 일본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기독교학문연구소는 기초 연구와 저서를 통해 세계와 특히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브라이언 월쉬(Brian Walsh), 리처드 미들톤(Richard Middleton),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 낸시 퍼시(Nancy Pearcey),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 크레이그 바르톨로뮤(Crag Bartholomew),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 필자가 모두 이 연구소 일원들이다.
미국 철학자인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이 북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사회, 문화, 정치에서 실제로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칼뱅주의 종교개혁의 사회적 비전을 ‘채용’하려 하였다. 이 채용은 개혁주의 전통이 본래 가지고 있던 ‘세계형성적’ 추진력 약화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다. 칼뱅주의자들은 성경대로 세계가 자연만 아니라 인간의 질서로 죄의 영향이 스며 있는 것을 보았기에, 세계가 하나님에게서 유리되지 않도록 재구성하려는 책임감과 열정을 가졌다. 월터스토프는 이러한 칼뱅주의자들이 자칫 승리주의(triumphalism) 또는 ‘지배 신학’(dominion theology)의 위험에 노출되곤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세계형성적 특성을 잃은 모습을 보인다고 비판한다. 월터스토프는 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샬롬’과 ‘정의’의 비전을 제시한다.
현대의 문화는 문화적 다원주의의 기초에 놓여 있다. 따라서 네덜란드의 기독교 철학자 크랍바이크(J. Klapwijk)는 오늘날 세계관 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세계관’이던 “되찾을 방법이 무엇인지”를 논의해야 할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세계관의 각축장이 되다시피 한 오늘의 문화 현실 속에서 기독교 세계관이 진리임을 입증할 방법은 신학과 철학적 논의로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문화적 힘으로서의 성경적 세계관을 보여주어야 함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비전이 열매를 맺는다는 증거는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 실재한다. 19세기 말 네덜란드의 신칼뱅주의 운동은 사회와 문화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특히 교육제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정권을 획득해 국가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들의 정황은 우리의 1980년대와 흡사하다. 카이퍼는 프랑스혁명의 인본주의 사상에 대항했던 ‘반혁명’ 정신을 자유주의와 은둔주의를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회문화적 변혁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청교도 정신에 뿌리를 둔 미국의 근본주의 운동이나 네덜란드계 이민자들이 발전시킨 세계관 운동은 북미 대륙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쳐왔다.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뿌리를 거기로 뻗쳐간 것은 단지 신학적 친화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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